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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Dec 14. 2021

영화 리뷰 - <이터널스(2021)>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던 '클로이 자오 식 히어로 영화'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샹치>와 마찬가지로 생소한 캐릭터들이, 무려 열 명 씩이나?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과정도 지난할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이 작품이 마치 과거 <저스티스 리그>가 저질렀던 처참한 실수를 반복한, '히어로물 계의 흑역사'로 남게 되지는 않을까 싶었기에 필자에게 <이터널스>는 기대 이전에 물음표가 먼저 떠오르게 만드는 영화였다. 하지만 클로이 자오라면, <노 매드 랜드>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휩쓸었던 그녀라면 기존의 마블 히어로 영화의 어법에서 벗어난 무언가 새로운 무언갈 보여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있었기에 영화관으로 향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노 매드 랜드>를 직접 봤기에 더더욱 그랬다). 과거 첩보물과 히어로물을 너무나도 잘 조합해 빅뱅을 일으켰던 <윈터 솔저>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영화 역시 히어로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작품이 되어줄 것인가?






※이어지는 글에는 영화 <이터널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영화 관람 후 다시 와주셔도 괜찮습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 '조화로움'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이터널스>는 필자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잘 만들어진 영화였다(시리즈의 이전 작품들인 <블랙 위도우>, <샹치>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랬고). 용산 아이맥스라는 제대로 된 판에서 감상한 것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모르겠다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 영화가 여러 가지 면에서 '조화롭게 잘 만들어진, 밸런스 있는 히어로물'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점에서 그랬냐면...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1.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던 '친구 찾기' 스토리


제 아무리 클로이 자오가 오스카 수상자라 한들, 이 영화는 분명 그녀에게 쉽지 않은 과제였을 것이다. 새로운 히어로들의 세계관을 정립해야 할 '<이터널스>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인 만큼 코믹스 팬이 아닌 일반 관객들에게도 캐릭터 하나하나를 소개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었던 영화였기에, 잘못하면 다소 유치하고 진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구성이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클로이 자오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마블은 물론이고 옆동네에서 만들었던 '친구 찾기 형식'의 히어로물들이 많았던 덕분에 참고할 표본들이 차고 넘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이터널스>의 중심축 중 하나인 '친구 찾기 스토리'는 이전까지의 히어로 물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특히 좋았던 점은 열 명을 모두 모아서 악에 맞서는 진부해 빠진 형식의 스토리가 아니라는 점이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모이는 과정 가운데 자연스레 이탈하며 결국 살아남은 이들이 악에 대항해 맞서기 때문에 보다 관객들 입장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구도가 형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열 명이서 하면 너무도 쉬워 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을 과제가, 더더욱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2. 그 가운데 버려진 캐릭터 하나 없음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는 영화는 대개 누군가는 화면에 더 많이 비치고, 또 누군가는 거의 미미한 존재감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그 차이가 크지 않다 한들 주연급과 주조연급 캐릭터들 간의 비중의 편차가 벌어지는 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설령 영화를 찍을 때에는 비중이 비슷했더라도 편집을 거치며 비중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영화의 최종본, 즉 극장에 걸릴 결과물에서 캐릭터들의 비중이 같게 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터널스>는 무려 열 명씩이나 히어로가 등장하는데도 그 어느 누구 하나 버려진 캐릭터가 없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역할인 주인공, 세르시(젬마 찬)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긴 했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저울에 달아놓으면 거의 비슷하겠다 싶을 정도로 그들 모두가 적지 않게 각각의 역할을 맡아 참으로 조화롭게 영화에 잘 배치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마블 영화들 뿐 아니라 모든 히어로물 가운데에서도 꽤나 돋보이는데, 클로이 자오 감독은 10인의 히어로들을 단지 군단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으로서도 매우 잘 활용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자애로움'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만능형 히어로'가 아닌 만큼, 그들 모두가 필요할 수밖에


원작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제한된 능력을 갖고 있는 히어로로 설정되었다. 비행 능력과 눈에서의 레이저 발사 능력을 동시에 가진 이카리스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터널스>에서 한 캐릭터에게 주어진 힘은 한 개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들 개인이 가진 능력은 모두 저마다의 메리트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짧고 굵게, 혹은 가늘고 길게


안젤리나 졸리와 셀마 헤이엑이라는, 묵직한 존재감의 주연급 베테랑 배우들을 다른 신예 배우들과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출연시켰던 것 역시 좋은 예시 중 하나. 


에이잭(셀마 헤이엑)의 경우 이터널스의 리더라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 캐릭터이지만 꽤 이른 시간에 퇴장케 해 짧고 굵게 임팩트를 남기게끔 했고, 테나(안젤리나 졸리)의 경우 강력한 전투능력을 보유하고는 있지만 어딘가 정신적으로 불온전한 상태에 놓인 캐릭터로 설정되어있어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다른 캐릭터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관객들이 이 두 사람을 그저 '이터널스의 일원'에 불과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아주 노련한 비중 조절이 이루어진 것이다. 클로이 자오가 무서울 정도로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감독이자, 스스로가 생각하는 대로 영화를 다룰 줄 아는, 아주 능력 있는 감독이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캐릭터 비중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리의 돈 리, 아니 마동석 형님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해보자. 그가 기존에 <범죄도시> 등에서 보여줬던 강력한 힘(과 가끔 보이는 큐트함)에 어울리는 적절한 연출이 이루어졌음은 물론 그 역시 스크린 타임 내내 자신이 가진 장기들을 잘 보여줬다(다만 그가 <범죄도시>에서 보여줬던 트레이드 마크, '뺨 때리기'가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임팩트가 다소 약해졌다는 사실은 많이 아쉬웠다). 비록 이번 작품에서 퇴장하기는 했지만, 영화의 설정 상 후속작에서 그가 다시 등장할 여지가 있는 만큼 앞으로 이어질 마블 시리즈에서 부활해 그의 압도적인 근육과 존재감을 뽐낼 기회가 다시금 주어지기를 바란다(<샹치 2>에서 샹치와 케이티, 웡과 함께 넷이서 노래방에 가는 장면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3. '철학적인 히어로물'로서 스스로를 차별화하려는 시도 역시 돋보였다


히어로물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난 느낌은 아니지만, 드라마 장르에서 확실한 강점을 갖는 클로이 자오 감독답게 진중한 메시지들을 많이 담는 것을 통해 <이터널스>를 적어도 '철학적인 히어로물'로 승화시키고자 했고, 그 노력만큼은 헛되지 않았다 느껴진다. 그 깊이가 기대보다 얕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인류애라든지, 인간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물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 정도는 제공했다 생각하며, 특히 '만들어진 이'로서 자아를 탐색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듬어나가는 과정은 과거 스티븐 스필버그의 역작, <AI>의 향수가 강하게 느껴졌더랬다(앞서 이야기했듯 그 정도의 깊이에 닿지는 못하였다마는). 아쉽긴 했지만, 분명한 것은 이 정도로 우리에게 시사할 거리를 던져줄 히어로물은 많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 '진보적'이었던 클로이 자오의 연출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앞서 말한 부분들에 더해 클로이 자오 감독이 할리우드 감독들 가운데에서도 굉장히 진보적인 연출을 하는 감독이라는 점은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보다 '한 층 더 앞선 연출이 이루어진 작품'으로 만들어주었다. 10인의 배우들 중 동양인이 무려 둘에 중동인, 흑인, 라틴계, 백인이 고루 섞인, 참으로 'PC주의적인 캐릭터 선정'은 물론, 동양인 여성 배우인 세르시를 중심으로 여성 캐릭터의 시선에서 이끌어가는 히어로물의 스토리도 구축했다(이는 기존에 <블랙 위도우>나 <샹치>와는 달리 남성에 대한 혐오나 비하, 형체 없는 피해의식 없이 여성 그 자체만을 들여다보고 자아를 찾아가는 방식의, 아주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생각한다).


특히 이터널스 중 한 명인 파스토스가 동성 연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는 설정으로 동성애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내비쳤는데, 파스토스와 그의 연인 간의 키스 장면이 등장하며 한 때 누리꾼들 사이에서 이를 두고 '동성애에 대한 강요가 이루어진 것 아니냐'는 불편한 여론이 조성되기도 했던 걸로 안다. 하지만 동성애가 정상이 아니라 생각하는 필자가 보았을 때에도 이 장면이 생각보다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을 보면, 상당히 영리하게 절제를 잘하며 그려졌다 해도 될 것 같다. 아마도 그 '키스'가 노골적이고 성적인, 그러니까 '에로스적인 사랑'으로 그려진 것이 아닌 정신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 간의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그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또한 숨겨진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리한 연출 중 하나.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세르시, 클로이 자오의 페르소나


앞서 이야기했듯 <이터널스>는 클로이 자오 감독의 페르소나인 세르시(젬마 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또 다른 예시가 더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이 본인의 페르소나 같은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주로 여성주의적, 인종적 관점)을 녹여내는 식의 구성을 한 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신선했다. 특히 이를 통해 <샹치>에 이어 또 한 명의 '매력적인 동양인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점은 같은 동양인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히어로이기 이전에 매력적인 동양인 캐릭터들이 거의 없었던 할리우드에서 앞으로 그녀가 세계에서 동양인들에 대한 인식이 변화될 수 있게 만드는 촉진제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최초의 농인 히어로' 등장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 영화에서 마카리(로런 리들로프)는 유일하게 수화를 하고, 진동으로 만물을 읽는 이터널스로 등장한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왜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알아보니 그녀는 실제로 농인 배우였던 것이 아닌가! 앞서 언급했듯 <이터널스>는 상당히 진보적인 연출이 이루어진 영화이지만, '최초의 농인 히어로'를 등장시켰다는 부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 비교하더라도 적잖은 의미를 갖는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다. 마치 과거 <블랙 팬서>가 흑인 히어로로서 그들의 위상을 올렸다는 점에서 흑인 사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는 그들 역시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히어로가 될 수 있다는, 그러니까 그들과 나란히 서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영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인 캐릭터를 억지로 흑인 캐릭터로 만드는 데 열중인 PC주의나, 남성 혐오와 비하, 시기 질투로 얼룩진 페미니즘보다는, 이런 것이 진정으로 평등하고 진보적인, 미래지향적인 연출의 하나가 아닐지? 할리우드의 많은 제작자와 관계자들이 그들의 연출 방향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를.




하지만, 아쉽게도 '히어로물을 초월'하진 못했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필자는 마블 영화들 가운데서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이 <윈터 솔저>라 생각한다(그래서 마블 영화 리뷰를 하면 거의 항상 언급하곤 한다). 히어로물과 첩보물, 그리고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를 계승해 완벽한 황금비율을 이룬 스토리는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한층 강화된 맨몸 액션과 그에 걸맞은 연출 능력으로 <어벤저스 1>에서 저질 싸구려 쫄쫄이를 입고 있던 캡틴 아메리카를 '일당백의 히어로'이자 '어벤저스의 리더'로 완벽하게 환골탈태시켰기 때문이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마블 최고의 작품을 <윈터 솔저>라 꼽으시는 팬 분들이 많으신 걸로 아는데, 이는 <윈터 솔저>가 히어로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지켰음은 물론, 다른 일반적인 첩보 액션물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완성도와 매력을 보유하고 있는, 그야말로 '히어로물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이터널스>는 그 정도의 작품은 분명 아니었다. 꽤 섬세하게 다듬어 조화롭게 만들려 노력한 작품임에는 분명 하나, 여전히 히어로물이라는 틀에 갇혀있는 느낌에 강했던, 그러니까 분명히 한계가 느껴지는 작품이기는 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클로이 자오의 한계가 드러난 또 하나의 작품이 아닌지


과거 필자는 <블랙 위도우> 리뷰에서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이 드라마 장르에 강점을 갖는 감독이지만, 도무지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물을 다루는 능력은 없는 감독이라 혹평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은 아니지만, 클로이 자오에게 있어서도 히어로 액션 무비는 딱 맞는 옷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그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결코 작지만은 않았던 것 같고. 영화 <이터널스>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의 중심에는 클로이 자오 감독 본인이 가진 '예술영화적 스타일'과 액션 히어로 장르의 부정교합이 꽤나 큰 존재감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1. '클로이 자오 식 연출'의 명과 암


<노 매드 랜드>를 보며 개인적으로 느꼈던 클로이 자오의 연출적 특징은, 오랜 시간을 들여서 한 인물을 주목하며 그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는, '긴 호흡을 가져가는 연출 방식'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이를 무기로 그녀는 지금까지 로드무비 등의 드라마 장르, 대중들에게는 흔히 '예술 영화' 혹은 '독립 영화'로 받아들여지곤 하는 류의 영화를 해왔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이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도 관객에게 깊게 생각할 여지를 제공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분명한 강점과 매력을 갖지만, 히어로 액션 영화라는 장르와 조화되기에는 매우 어렵지 않았나 생각한다(적어도 현재까지는,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이기 어려운 것과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터널스> 역시 히어로물이라는 골격을 갖고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중심은 세르시라는 캐릭터, 그녀의 내면에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던 중 갑작스러운 데비안츠들의 등장과 리더였던 에이잭의 죽음을 통해 그녀가 겪게 되는 급격한 심경의 변화, 자아의 재인식, 그리고 고뇌. 그리고 이를 통해 클로이 자오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세르시라면, 어떻게 느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는 분명 기존의 히어로물의 문법과는 다소 궤를 달리하기에, <이터널스>를 히어로 무비인 듯 히어로 무비가 아니게 만들고, 관객들에게 강하게 호불호가 갈리게 만드는 여지를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마블 영화'를 생각하고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신나고 통쾌하게 때려 부수는 영화'를 즐기러 왔을 관객들에게는 과하게 생각해야 할 여지를 많이 제공했기에 다소 투머치 했던, 그러니까 무겁고 루즈한 영화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액션보다 드라마의 비중이 높고, 그마저도 크게 임팩트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에 굉장히 이질적인 히어로물이 될 수밖에. 클로이 자오 감독의 인터뷰나 생각들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필자는 그녀가 <이터널스>를 히어로물이기 이전에 '한 캐릭터가 자아를 탐구해가는 과정'을 그린 일대기라 생각하고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이전에 해오던 것처럼 말이다. 


후속작에서 그녀가 메가폰을 잡게 된다면, 이런 부분에서 오는 한계들을 인지하고 보다 기존의 히어로물에 가까운 형태로 영화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적어도 대중성과 흥행을 우선으로 고려한다면 말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2. 매력적이지 못한 악당 캐릭터


사건의 멀찌감치서 흑막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셀레스티얼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영화의 메인 악역인 '데비안츠'가 전혀 매력이 없다는 사실 역시 이 영화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악역인 '미믹'이 떠오르게 만드는 비주얼인데, 포스만큼은 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믹의 경우 갑자기 땅 속에서 솟아나며 기괴한 굉음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돌격해오는지라 그 포스가 굉장했는데, 데비안츠의 경우 이터널스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며 스스로의 강력함을 증명했다고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이터널들이 약했기 때문으로 그려진 것 같았다. 악역을 강하게 설정해놓은 것이 아닌, 선역을 약하게 그려서 악역의 힘을 강화시킨 느낌이랄까. 


또한 CG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트랜스포머 1>, <아이언맨 1> 이후로 관객들이 CG를 바라보는 눈은 매우 높아져있는 상태인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런 식의 수준 낮은 CG로 떡칠된 악역을 내놓는 것은 참으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샹치>보다 조금 낫기는 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특히 에이잭과 길가메시를 흡수하고 난 뒤 인간화된 모습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3. 다소 '투 머치'했던 설정들


특히 이카리스라는 캐릭터, 공감하실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던 캐릭터였다. 이 캐릭터, 애초에 표정부터 '딱 기다려... 나 나중에 배신할 거야...' 하고 있어서 애초에 신뢰 자체가 가지 않아 상당히 캐릭터가 일차원적으로 느껴졌음은 물론,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따온 본인의 이름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마지막에 굳이 태양으로 날아가 불타 없어지는, 다소 불필요한 선택을 하는 등 너무 과하게 '자의식에 도취된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원작이 그랬는지, 각본가의 선택이었는지, 이 또한 드라마 적인 요소를 넣기 위했던 클로이 자오의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미지 출처 : 조선일보 [SC초점]"혹평 봇물+히로시마 원폭 논란"…'이터널스' 개봉 첫날 압도적 1위에도 불안한 이유>

논란의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자폭탄 폭발 묘사 장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무조건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장면이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이터널스 중 '기술의 신'인 파스토스가 인간들에게 전수한 기술력이 원자폭탄의 발전으로 이어져 일본에서의 폭발이 발생, 스스로가 대학살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에 자책하며 오열하는 이 장면은 이후 이 영화의 각본가인 매튜 K. 퍼포와 라이언 퍼포가 일본계 미국인(일본에 가족을 두고 있기도 한)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들이 추후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일본은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언급하며 논란은 더더욱 그 몸집을 불려 나갔다.


우선 분노를 잠시 거두고 영화만을 놓고 보자. 기술의 신인 파스토스가 그의 기술력으로 인해 생긴 비극에 큰 충격을 받고 은둔하게 되는 계기라는 점에서는 나름 아귀가 들어맞는, 수긍이 가고 자연스러운 스토리 흐름이기는 했다. 생각보다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려진 장면이었다는 것이다(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그랬다).


1) 우선 해당 장면에서 파스토스는 '제3자'인 신의 입장에서, 핵을 터트린 가해자인 미국, 핵을 맞은 피해자인 일본 그 누구의 편도 들고 있지 않았고, 그저 인류를 위해 선물한 기술력이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에 이용되었다는 사실과 그런 선택을 한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그들이 가지지 말았어야 할 막대한 힘을 선물한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오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또 국가적 감정을 떠나 원자폭탄이라는 흉악한 무기가 한 나라에, 그것도 두 방이나 터졌던 사건은 분명 '기술의 발전에 의해 발생했던 인류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고, 이는 지구를 처음부터 키워왔던 기술의 신인 파스토스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었음은 납득할 수 있는 스토리이므로(마치 과거 노벨이 광산을 효과적으로 뚫기 위해 개발했던 다이너마이트가 전쟁무기로 변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것처럼).


하나 많은 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이 장면의 기저에 '일본은 가해자가 아닌, 오로지 피해자일 뿐'이라는 잘못된 역사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 이는 비단 그 각본가 개인만의 잘못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생각하며, 그렇게 봐서도 안 되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왼쪽 - 전쟁 미화 논란을 빚었던 영화, <바람이 분다> / 오른쪽 -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미화하는 역사왜곡 영화 <영원의 제로>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잘 아시겠지만 아직까지도 전범국으로서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안고 피해국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살고 있는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과거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을 역사왜곡 등을 통해 세탁하고, 그들이 '피해자이기 이전에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없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진 몇십여 년 간 젊은 세대들에게 교육, 문화, 미디어 등 다양한 방면으로 그들의 가해자로서의 부끄럽고 추악한 과거는 삭제하고, 피해자로서의 비극만을 부각했으며, 전쟁에 가담했던 전범들을 영웅으로 추앙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아왔다.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그런 교육을 받아온, 그런 환경에 살아온 탓에 제대로 된 역사를 모르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매튜 K. 퍼포와 라이언 퍼포 역시 그런 '역사왜곡의 피해자'들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반일 정서가 너무나도 강할 수밖에 없는 한국에서는 이런 이야기 자체가 받아들여지기 어렵겠지만, 필자는 이런 이유로 일본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무조건적인 혐오와 반감을 품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생각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직도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그들의 세력을 넓히려는 야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 정부와 그 수뇌부들이어야 한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지만, 그저 이번 영화를 계기로 해외에서 이러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데에는 제국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본 정부의 탐욕이 있었음이 드러나고, 일본이 오로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그 사실에 대해 명백히 알게 됨은 물론, 이러한 비극이 두 번 다시는 세계에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대한민국의 든든한 우방국이기는 하지만, 과거 미국이 핵이라는 수단으로 수많은 죄 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불사하며 전쟁을 끝낸 것 역시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지, 우리 역시 다시 생각해볼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이 정도면 급한 불은 껐다


제 아무리 흥행 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지만 <블랙 위도우>와 <샹치>는 퀄리티적으로는 분명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는, 아니 처참한 작품이었기에 마블 영화가 보다 퀄리티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이번 <이터널스>가 더더욱 좋은 작품이 되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클로이 자오가 마블에게 있어서 훌륭한 소방수 역할을 잘해주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곧 개봉할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은 캐릭터의 유명세와 인기 덕분에라도 망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만큼, 마블의 즐거운 연말을 향한 신호탄은 조금 늦었지만 확실히 쏘아 올려진 느낌이랄까.



후속작의 메가폰 역시 클로이 자오 감독에게 쥐어주었으면


많은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터널스 2>가 만들어질 경우, 그 감독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로이 자오여야만 한다 생각한다. 세르시를 중심으로 한 서사라든지,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특유의 영화적인 구성 방식은 분명 <이터널스>만의, 그리고 클로이 자오만의 고유한 것이니 만큼 누구도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일뿐더러, 분명 이번 작품에서는 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만큼 클로이 자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전부 이끌어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보이기에, 2편에서는 보다 더 깊어진 철학과 이야기로 관객들을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윈터 솔저>의 대흥행으로 <인피니티 워>와 <엔드 게임>의 감독까지 맡아 흥행 사가를 이끌었던 루소 형제처럼 마블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어줄지도 모르는 만큼, 이번 작품이 <윈터 솔저>를 위한 발판으로서 만들어졌던 <퍼스트 어벤져>와 같은 작품이었다 생각하고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이번 영화를 통해 마블은 앞으로 더욱 넓어진 세계관 속에서 더더욱 거대한 스케일의 사건들이 도래할 것을 예고했다. 새로운 캐릭터와 이야기들, 그리고 그들을 뭉쳐 결국 <어벤저스>라는 형태로 빚어낼 그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낼지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너무 몸집을 급하게 키운 나머지 '코어 근육'의 단련은 전혀 하지 못했던 '옆동네'의 전철을 이들이 밟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지만, 일단 연말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선물이 될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을 즐긴 뒤에 생각해보는 걸로...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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