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이 자폐래요 23

(25.12.20)

by 우리 아빠

1.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우리에게 젓가락 사용법을 연습시켜 보았다.


23b.jpeg
23a.jpeg


뻥튀기를 잘개 쪼갠 뒤 반찬통에 담고

아기용 뽀로로 젓가락을 쥐어준 뒤

꼭 젓가락만을 사용해 뻥튀기를 먹게 했다.


우리는 아직 서툴지만 곧잘 해냈다.

숟가락과 포크를 마스터한 우리 아기가

이제 곧 젓가락을 사용할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2.

결국 우리가 관장을 했다.

마지막 변이 내일이면 일주일이라는 말에

의사 역시 바로 관장을 권한 것 같다.


여자 화장실로 들어간 우리를 간이 침대에 눕히고

간호사가 들어와 호스를 꽂아 관장약을 항문으로 넣었다.


간호사가 나오고 화장실 문밖에서 대기하던 나는

부리나케 들어가 아기를 붙잡고 있는 와이프를 도왔다.


관장약이 들어가고 대변을 참아야 하는 시간, 약 5분여.

와이프는 손으로 아기의 항문을 잡고

나는 발버둥치는 우리의 몸을 붙잡았다.


그리고

한무더기의 변을 본 우리 아기.


엄마, 아빠가 미안해ㅠㅠ


더 소화가 잘되는 음식으로 건강하게 먹이고

간식은 줄이고

과식은 지양하며

변비약도 꾸준히 먹고

몸도 많이 움직여

다시는 관장하지 않게 해줄게.


우리 아기, 너무너무 미안해.




3.

회사 동료와 그 동료의 친구분이

오후에 집을 방문했다.


얼마 전 있던 회식에서 우연히 옆에 앉게 된 동료분이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 아기의 자폐 스펙트럼 진단 얘기를 하게 되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분은 친구 이야기를 해주셨다.


몇 번의 시험관 시도 끝에 갖게 된 세 쌍둥이.

그런데 그 세 쌍둥이가 모두 자폐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감히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다.

시험관을 하고 싶었다는 것은

분명 자연임신의 어려움이 있었을 터였고

여러번 시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아기를 절박하게 기다리셨다는 뜻이었을 텐데...


그분을 소개해 주시겠노라 하셨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간단한 인사 후

ABA에 대한 고민,

특수 유치원 및 초등학교,

필요한 교육들에 대해 여쭤봤고

그분은 정성스레 대답해 주셨다.


두 시간여 집에서 티타임을 가졌는데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낯설었는지 잘 놀다가도 크게 울고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도 질렀다.


"어휴, 이 정도면 약과에요. 우리 너무 예쁘구나!"


그 어떤 유익한 정보를 얻어서라기보다는

이런 깊은 이해가 담긴 진심 어린 공감이 너무나도 좋았다.


와이프와 전화번호까지 교환하고서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말도 뒤로한 채

다음에 또 보자는 말씀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셨다.


앞으로 종종 지치고 힘든 날을 지나게 될 와이프가

그래도 주변에 나와 같은 전우가 있다,

생각하며 느끼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시작이 오늘이길 바래본다.




4.

"우리 아기는 분명히 좋아질거야." 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말은

여러모로 지금의 나에겐 좋지 않은 것 같다.


그것보다는


"우리 아기가 어떠한 상황이라도 행복하게 살 거야."가

훨씬 지금의 내 삶을 풍요롭게 살찌우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오늘 난 그 다짐에 가까워졌는지,

단 한 걸음이라도 다가갔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만 저녁을 다 먹고 아기를 목욕시키고 나온 와이프에게

"고생했어"라며 가벼운 뽀뽀를 하는 순간,

우리도 다가와 "엄마에게 뽀뽀, 아빠에게 뽀뽀"

그렇게 셋이 번갈아 뽀뽀를 교환하는 그 찰나에


"오늘 하루는 이 시간을 위한 거였구나."

행복에 겨워 미래에 펼쳐질 '어떠한 상황'들을 고이 접어두었다.


행복했다. 오늘도.

작가의 이전글우리 딸이 자폐래요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