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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경퀸 Aug 07. 2023

여미새? 남미새? 제 주위에는 없는데요 002

정체를 숨기고 있는 그들의 본모습을 만난 직후의 당혹스러움에 대해

'나는 정말 이해가 안가. 왜 그러는거야?'


우려하던게 터졌다. 그녀의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에 기름폭탄을 불길에 던져 놓은 것처럼 터져버린 것이다.


나는 쟤 취한것도 알겠고, 이것도 알겠고, 너가 왜 화난 표정인지는 모르겠고. 경태 멀리서 왔어. 근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민수는 울화통이 터진다는 표정과 걸음걸이로 와다다 모든 것을 토해냈다. 저기 잠깐만요. 그러다가 쓰러져. 아니 거기는 돌밭이고 아 참. 거기 가만히 있어봐요 서서 얘기합시다 우리.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게 포인트. 또렷한 정신 속 모호한 공기에 허공에 쏟아지는 이야기들. 결론은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반쯤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술의 위험성이란.) 해줄 말은 크게 있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시끌시끌한 뉘앙스의 말들이 귓가를 스쳐지나가고, 그의 목소리가 잡음이 아니라 주위에 자동차 소리, 묽은 신발 소리가 잡음이 될 무렵 그는 명료하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네가 할말이 없다고 하면 나는 정말로 더 이상 할말이 없어.'


그 신호만 기다렸지. 그쯤부터는 나도 그에대한 감정과 마음이 식었다. 아이같은 구석도 꽤나 예쁘긴 했는데 이렇게 와다다 쏟는 모습은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른스럽지 않았다. 아. 그건 제가 오늘 데리고 다녔는데 중간에 꼬인 것 때문에 기분이 안좋아 보였을거예요. 오해예요. 기분 나쁘게 했다면 죄송해요. 민수는, 한참을 했던말을 반복하더니 서 있기 힘들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내 핸드폰은 몸을 흔들며 한동안 윙윙거렸다. 발신자는 지혜. 전화를 받자마자 어디냐는 볼멘소리가 들렸다. 금방 간다는 말과 함께 걸음을 서둘렀다.


'둘이 뭐하고 왔어.'

'키갈하고 왔어.'

'어 진했지.'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뒤로 한 채 다시 분위기로 녹아 들었다. 대학생 때 어느 술자리를 가도 적응 잘 했던 탓에 이런 분위기를 푸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시덥잖은 말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들고, 날 두고 갔다고 삐진 지혜의 기분도 풀어주고. 경태는 그 와중에도 연신 유하게 분위기를 받았다. 거의 경태와 나의 합작이라고 할 만큼 부들부들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담배좀 피고 올게. 아, 그러면 나는 화장실. 남자 둘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각자의 방향은 달랐고 지혜와 나만 둘이 남아 있었다. 뒤통수에서 큰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크레센도로 들려왔다. 부와아아앙. 그만한 고요함이 나와 지혜를 감쌌다. 곧 터질 것처럼 벅찬 압력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 섭섭하다고, 왜 나만 두고가. 경태 있었잖아. 형이 뭐랬는데? 둘이 진짜 무슨 얘기 했는데. 어? 


지혜는 꼬치꼬치 묻는다고 할 정도로 형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았다. 형이 한 얘기를 요약해서 전달하기도 애매했던지라. 내가 기분이 안좋아보여서 무슨일 있나 했대. 약간의 오해가 있었어서 그거 풀고 왔어. 진짜 별일 없었어. 그리고 민수가 내가 좋다고 한 그 사람이야. 


'민수가? 아 그때 그 챙겨주고 싶다고 했던 그사람?'

'응. 귀엽잖아.'

'그럼 너 내가 민수 꼬시면 빡칠거야?'


사람 상대하는 일을 오래 하다보면 저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또는 장난이 섞인 진심인지 진심이 섞인 장난인지 파악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반쯤 내리깐 눈, 민수가 사라진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눈길.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아, 지혜 너 지금 저사람한테 호감이 있구나. 하지만 빠른 파악과 다르게 내 입에서는 미적지근한 대답이 나갔다.


왜 호감가? 응. 내 스타일인데. 마음에 들어. 경태는? 걘. 좀 가벼워 보여셔. 지혜의 끝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경태가 등장했다. 얼마 뒤 민수마저도. 큰 눈을 깜빡이며 왜. 뭐. 라고 하는 민수에게 나는 그저 '아니에요.'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지혜의 눈이 너무나도 진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뒤로 지혜의 온갖 잡기가 시작되었다. 대각선으로 멀리 있는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가 먹던 빙수를 나도달라며 가져가 먹고. 자신에게서 관심이 떨어지면 또다시 괴성을 질렀다. 그나마 다행인건 중간부터 내 지인이 합석했다는 것이었다. T의 정석이라고 불릴만큼 단호한 그녀석은 '여기가 제가 앉을 자리인가요.'라는 말 몇마디와 함께 합석했다. 일전에 다른 장소를 추천해준것도 이녀석. 알고 있는 지인 중 가장 젠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격 탓에 술자리에 융화되는 것은 빨랐다. 그는 진중했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두 남자도 진지했다. 거기서 계속 헛소리를 하는 것은 지혜 뿐이었다. 


'....그래서 상생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제가 게을러서 실천이 어렵네요.'

'아냐. 지금 듣기만 해도 너 게으르지 않아. 그나이대에 충분히 잘 하고 있.'

'철수라고 했나? 했나요?'


네? 네. 지혜는 의자 등받이에 잔뜩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낀 채 발을 까딱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힘들잖아. 재고털고 이런것도 인생사는게 말야 그치? 철수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당황할만한 상황에 당황하지 않는 것이 녀석의 특기. 모든 시선이 지혜와 철수에게 쏠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정리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재고는 문제가 안돼요.'

'아니. 그러니까....'

'네.'


아니야. 그녀는 내심 철수가 당황하기를 바라는 표정이었는데. 철수는 그렇게 지혜를 잠재우고 본인이 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지혜는 한동안 왼쪽 위 하늘을 쳐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듯 보였다.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잔잔한 이야기가 오가던 자리는 4시에 마감이라는 직원에 등장에 사르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되어버렸다. 이미 막차는 없고 첫차를 기다려야 할텐데. 대체로 첫차는 다섯시부터 아닌가.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철수의 집에서 잠깐 있다가 나가기로 했다. 


맨 앞에는 철수가, 그 뒤로 남자 둘이. 맨 뒤에 나와 지혜가 걸어가고 있었다. 피곤하다. 죽겠다를 말하면서.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지혜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남자들 사이로 쏙 들어갔다. 한 손에 한명씩 손을 잡고서. 경태는 곧바로 손을 빼고 철수에게로 걸어가면서 집이 어디냐 되물었고 민수는 반쯤 눈을 감은 채 걸어갔다. 그러다가 지혜가 팔짱을 꼈다. 거의 매달리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꽉 끌어안은 상태. 아, 지혜 너는 몸으로 남자를 꼬시고 싶어하는구나. 


그때부터는 딱히 분하거나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몇 년간 알았던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허탈감이 더 깊숙하게 자리했다. 민수는 경태가 있었던 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지혜가 본인만 잡고 있는걸 보고 손을 확 빼내었다. 파리지옥이 민달팽이를 놓친 것 같은 표정으로 지혜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민수는 경태쪽으로 걸어갔고 타이밍 좋게 신호가 바뀌었다. 원래같았으면 지혜를 챙겨서 걸어갔겠지만 그정도의 성인군자는 아닌지라. 기어가는 듯한 민수의 등만 천천히 밀어주었다. 형, 빨리 가요. 신호 끊기겠어요.


그쯤이 술자리를 한 11시간 가졌을 무렵 같은데. 그 뒤는 솔직히 동물의 왕국 정도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철수의 침대에 앉아 있던 지혜는 민수의 손과 팔을 잡고 내 옆에 앉으라며 징징거렸고. 이미 체력의 한계를 맛본것 같은 민수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뭐 먹을거라도 사올까? 하는 경태의 말에 지혜는 거의 잠든 듯한 민수를 두고 경태의 팔을 잡았다. 나랑 가자!


둘이서 돌아오자마다 경태는 약간 얼타는 얼굴로 말했다. 아, 이 누나 진짜 왤케 못걸어. 그렇게 힘들면 왜 쫓아나왔나 몰라 진짜 방에서 누워있지. 지혜는 푸흐흐흐 하고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미안미안. 내가 다리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아서. 아 힘들다. 경태 너 정신력 정말 좋구나아. 


꽤 많이 방문했던 공간이라 경태와 지혜가 집으로 들어온 중간부터는 약간 졸았던 것 같다. 남은 넷도 술을 거의 안 마셨던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섯시 반 쯤 되었었다. 한여름의 해는 무척 빨리 뜬다. 건물을 나가자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태양과 그와 어우러진 파란 하늘이 반겼다. 지혜는 멀쩡했다. 지하철역까지 남자 둘을 바래다 주고 지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가' 하며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평소였으면 잘 들어가라는 전화라도, 또는 톡이라도 했을텐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한 5분 걸어갔을까. 철수에게 전화가 왔다 잘 가고 있냐며. 그렇게 하루의 끝과 시작을 함께 열었다.

다른 친구가 기분을 풀어야 한다며 데리고 간 10여년 만의 롯데월드

지혜는 하루가 지난 다음날 고양이 짤을 하나 보냈다. 뭐냐고 했더니 안 봤냐며, 다음에 보면 얘기해 준다고 했다. 별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지만 일단은 알았다고 보냈다. 그리고 술자리가 끝나고 사일 째 되던 날 그녀의 카톡이 무섭게 이어졌다. 어디냐며, 오늘 같이 안 갈거냐며. 난 오늘 일찍 끝나서 먼저 간다며. 그랬다가 전화를 계속 했다가. 나 지금 너 보러 왔는데 문 닫혀있네.. 휴가구나? 빵사왔는데.... 마침 다른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터라 지혜의 톡을 읽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읽었다는 표시를 보내자마자 그녀에게서는 이런 톡이 왔다.

혹시나 얘기하는데 정산하면서 민수랑 카톡 주고 받았어.
다음주쯤에 시간 맞으면 보자 하다가 흐지부지됐어
너 서운하고 나 미운 마음 들었다면 내가 너무너무 미안해

굳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 했고, 내게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민수가 호감있어하던 그 사람이라며 별 생각 없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따로 연락주고받고 하는걸 네가 나중에 알게 되면 기분 상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
그래서 얘기했어 근데 나한테 뭐 서운한 일 있니?

전화가 오지만 받지 않았다.

서운한 일은 없었어 내가 일방적으로 당한거지

통화 돼? 
그뒤에 어떻게 뭐가 된건지 기억 안나는데
그날 내가 무슨 실수했어?

기억이 안날리가 없지. 지혜야. 

호감있다고 하자마자 네가 꼬시고 싶다며. 꼬시면 빡칠거냐고 했잖아.

몇초의 간격도 없이 일어난 말을 왜 선택적으로 기억한다고 하는거야.

그뒤로 나는 동물의 왕국을 보는줄 알았어

술을 못 마시면 마시질 말아. 주량을 모르면 좀 알려고 노력하고. 

아.. 내가 너무 선 넘었네 미안하다 정말 
어.. 미안해 

그 뒤는 별게 없었다. 나는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너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던거라고 전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까. 

오랜 시간 알아온 지인인만큼 며칠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지혜가 내게 100만원이고 500만원이고 사기를 쳤으면 이해라도 했을거다. 생활고가 힘들구나. 그러면 그냥 빌려달라고 하지 지지배. 하면서. 나는 우리 둘의 관계가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어그러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회는 여러번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나를 간 볼 게 아니라 그때 술자리에서 내가 너무 과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더 못할것 같아서 지금 말한다. 내가 눈이 뒤집혀서 그랬다 미안하다. 다 기억난다. 미안하다. 라고만 했어도 나는 그녀를 이렇게 한번에 놓지는 않았겠지. 


다음주에 시간 나면 보자 했다가 흐지부지 됐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처럼 나를 만만하게 본 것도 불쾌했다. 누가 봐도 들이댔다가 까이고 나서 이도 저도 아니겠다 싶으니까 다시 내게로 온게 아닌가. 기억이 안난다면 기어이 빵까지 사들고 찾아오고, 연락이 안된다고 전화를 하고, 굳이 혼자 찔려서 자신이 그와 연락했다는 말을 내게 하며 저렇게 절절하게 사과할 리가 없지. 


거짓말에 성의가 없어도 사람이 기분이 상한다는 것을 3N년 만에 깨달았다.

성의없이 나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게 참 아쉬웠다. 


실수는 했고 관계는 지속하고 싶고. 딱 그 마인드일 것이다. 민수가 지혜에게 여지를 줬다면 내게 저렇게 사과하는 톡을 보낼 일도, 내게 연락을 하고 전화를 하는 일도 없었겠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썸아닌 썸은 그날부로 끝나버렸고, 나는 하룻밤의 술자리로 좋아하던 사람과 좋아했던 사람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경태는 그뒤로도 꾸준하게 연락이 와서 꽤 친한 지인의 자리를 꿰찼다.


나는 지혜 네가 남자에 그렇게 미쳐있는 사람인줄 몰랐어. 

알았으면 이성이 있는 자리에 널 부르지 않았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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