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엉경퀸 Aug 31. 2023

돈 주는 사람과의 여름휴가(상)

직장 상사이자 오너인 사람들과 여름휴가 마지막 저녁을 함께했다.

서걱거리는 오후의 낮, 오전 수련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두타임 다 듣고 간다며? 아뇨. 배가 너무 고파요. 우리 밥 있어, 수업 듣고 밥먹고 3시꺼 수업도 쌤이 해주고 가. 예? 솔직히 그게 진심이시죠. 맞아. 뭐해 일해 쌤. 만담이라고 할 만한 대화가 몇 번이나 핑퐁치듯 오갔다. 락커에서 짐을 싸서 슬그머니 나가려는 순간. 실장님과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던 원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참고로 대표가 사춘기입니다 시리즈의 원장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면 쌤도 데려갈까? 쌤, 광복절에 뭐해?


ISTP의 정석인 원장님의 물음에 속으로 생각한다고만 했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아니,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려고요?




레이크 스토어(Lake Store). 일전에 소개팅을 했을 때 양주가 처음이라며 소개팅남이 열심히 알아 온 곳이었다. 하프 글램핑장이라고 해야할까. 모닥불을 피울 수도 있고, 천막이 쳐져 있는 곳, 한옥같은 곳, 독채 느낌처럼 나는 분리된 공간 등 여러가지 자리가 있는 곳이었다. 전체적인 컨셉은 캠핑과 산장. 콘크리트 지옥이라 불리는 서울에서는 가히 찾아보기 어려운 공간이고, 남양주 별내, 고양시나 강릉 등 지방과 경기 외곽쪽에서는 꽤 비슷한 컨셉들을 발견할 수 있다. 땅값이 저렴하고, 주위에 자연 환경까지 있으니 휴양하러 온 느낌이었다.


광복절에 딱히 일정이 없었던터라 그분들의 일정에 합류하게 되었다. 일전에도 수업 끝나고 밥이나 먹자고 해서 하루 종일 배가 꺼질 틈도 없이 먹으러 다녔던 적이 있었다. 낮 12시나 1시로 예약을 하려던 원장님은, 폭염인 것을 보고 시간을 변경했다. 쌤. 5시 어때. 뭐 해? 아니요. 뭐 없어요. 그러면 그때로 예약하자! 원장님의 분신인 달콤이(말티즈, 8세)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 내가 예전에 추천해 드리기도 했었다. 그게 벌써 3주 전인데 이제야 가보신다니. 

예약 못하니까 쌤한테 대신 해달라고 한거잖아. 어 맞아. 실장님과 원장님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남녀가 바뀐 이효리와 이상순 같기도 했다. 미묘하게 다르지만. 그분들의 데이트에 끼어서 돌아다니다 보면 왜 아이유가 그렇게 제주도를, 이효리와의 시간들을 그리워 하고 좋아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날 청주에서 하루 종일 있다가 올라와서인지 늦잠을 잤다. 어차피 저녁 늦은 시간이니 늦게 일어나도 크게 지장이 없었다.




원장님의 차를 타고 약 40분이 걸리는 레이크 스토어로 도착했다. 오빠. 산책가방 챙기라고 했잖아. 아니 그러니까요 쌤 왜 안챙겼어요? 예? 제가요?(저는 저희 집에서 바로 픽업당했는데요?!) 아휴 정말 우리 달콤이 생각 안해요? 나쁜 사람. 달콤아 물어! 시덥잖은 티키타카 속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갔다. 예약할 때 사장님이 연휴 마지막 날이라 자리잡는게 치열하진 않을 거예요 라고 했듯이 사람이 많지 않았다. 널널한 자리들 중, 강아지가 있기에 외부로. 산 근처에 있는 1.5층에 위치한 천막 안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기는 두 종류. 칼집 삼겹살과 소갈비살. 각각 400g씩인데, 실장님이 삼겹살 하나를 더 집어올리는 것을 단호하게 말렸다. 실장님 저희 세명이고요. 그거 추가하면 두 근이에요. 1.2kg. 저희 라면도 먹어야 하고. 된찌도 먹어야 하고요. 그리고 또... 이미 원장님은 라면 코너에서 라면을 보고 있었다. 알맞게 손질된 쌈채소와 주류(호가든 3병과 스프라이트 하나), 햇반과 김치 등 각종 재료를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를 했다. 자리세(일반 자리가 아닌 천막이 쳐져 있는 자리들은 추가 이용료가 2-3만원 붙는다고 했다)를 포함해 15만원이 나왔다. 와씨. 물가가 이게 맞나.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소름이 쫙 돋았다.

사랑스러운 달콤이

입추가 지나긴 했지만 해가 느리게 지는 늦여름이었다. 다섯시 반 쯤 되었음에도 하늘은 맑고 뿌연 파란색을 자랑했다. 몽글몽글한 순두부같은 질감의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다 보니 옆에서 '달콤아!'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남자 손님을 아주 용맹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원장님은 호다닥 가서 달콤이를 넘겨받았고(남자 손님이 달콤이가 계단을 내려서 자리를 이탈하려는 것을 막아 주셨다. 감사하게도.) 그대로 달콤이는 우리 자리로 연행되었다. 


원장님 달콤이 낯 가리지 않아요?
어어. 가리지 여자한테만. 남자한테는 안가려.

너이자식. 너도 여자라고 너이자식. 


요가원에 처음 왔을 때 한창 나만 보면 짖어서 눈물이 찔끔 날 뻔한게 몇 개월인데. 처음본 사람이지만 남자라는 이유로 맹렬한 짖음을 안 당하다니(?) 조금 억울했다. 원래도 간식 준 적 없지만, 앞으로 남은 2023년 동안 아주 없을 줄 알아. 


돼지부터 굽겠습니다. 치익,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느순간 실장님이 모든 것을 세팅한 채 고기를 굽고 계셨다. 소시지와 채소도 함께. 그렇게 돈 주는 사람과의 반캠핑이 시작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대표가 사춘기입니다 005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