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딘가에는 써먹겠지
메일함을 정리하고 싶었다. 문득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일었기 때문이다.
새해가 되면 대청소를 하고 싶듯, 나의 이곳저곳을 쓸고 닦고 또 불필요한 걸 털어내고 싶었다.
나는 네이버와 다음 메일을 주로 사용했었다(지금은 네이버와 구글을 메인으로 쓰고 있다).
이번에 메일함을 정리한 건 네이버와 다음.
그렇게 메일함의 이곳저곳을 탐방하며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메일함에 첫 메일을 발견했다.
건물 건설을 위해 땅을 파다 공교로이 역사 깊은 유적이라도 발굴한 듯,
혹 디지털 풍화의 쓸려갈까 조심스럽게.
보낸이와 메일 제목과 받은 날짜와 시간을 찬찬히 살폈다.
네이버에 첫 메일은 이렇다. 몇몇 부분만 빼고 그대로 올려본다.
보낸이 o-game.co.kr
날짜 06.09.29 (금) 오전 12:10
제목 OGame 비밀번호
내용 안녕하세요, 오게임에 등록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1 행성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오게임은 실시간 웹게임이다. 친구의 권유로 게임 아이디를 만들었었다.
실시간 웹게임이라 얼마 안 가 다 털리고 접었지만.
다음에 첫 메일은 이렇다. 몇몇 부분만 빼고 그대로 올려본다.
보낸이 미쌤(중학교 담임선생님)
날짜 03.03.17 (월) 00:00
제목 ^^
내용
말없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휴자를 보면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호호호!!!
일 년 동안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보자.
학교생활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 있으면 가까이에 선생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렴.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구나
어떤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까?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 두려울 것이 없단다.
화이팅
중학교 담임 미쌤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보낸 메일이다.
내용 부분에는 밝은 녹색 배경이 쓰였는데, 녹색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묵묵히 맡은 바 최선과 책임을 다했던 아이였을까. 그냥 조용해서 좋게 봐주셨을지도.
미쌤에 대한 추억이 하나둘 더 떠오르면 글로 옮겨봐야겠다.
첫 메일을 보니 처음 만들었던 메일주소가 떠오른다. 초등 3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 컴퓨터실에서 우리 반 애들은 선생님과 함께 메일 가입을 했다. 하나하나, 담임선생님을 따라.
어려울 것은 없었다. 순서대로 내 정보를 입력만 하면 됐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회원가입 첫 시작이 아이디 란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디(Identity Document), 메일주소로 서로 편지를 보내고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특별하고 멋지고 센 걸로 하고 싶었다.
무언가 신비스럽고 무지 강한 느낌의 아이디.
그렇게 생각하니 이건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 안에 무조건 메일주소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탱크… 어떨까.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단어. 탱크.
시간에 쫓겨 만화 속 로봇 이름이나 특별한 힘을 가진 캐릭터의 이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나는 탱크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때 당시 KMTV에서 방영한 ‘쇼! 뮤직탱크'라는 음악 프로그램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TANK.
탱크 뒤에는 생년월일을 붙였다. 멋졌다! 나름 만족하며 수업을 마쳤었다.
그리고 이 아이디는 얼마 안 가 폐기 처분된다. 친척형 정에게 이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키키키! 메일주소가 이게 뭐냐?
내 생애 거의 처음 받아 본 혹독한 혹평.
멋져 보였던 탱크는 친척형 정의 입에 오르내린 후로는 더 이상 멋져 보이지 않았다. 구렸다.
얼마 안 가 나는 이름과 숫자를 조합한 메일주소로 바꾸게 된다(나중에 또 바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