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딘가에는 써먹겠지
집 아저씨 학교 다닌다~
오랜만에 내려간 대전 본가에서 엄마 순애는 대뜸 말했다. 집 아저씨는 아빠 현우를 말한다.
현우는 말이 많지 않다. 무뚝뚝하다. 남자는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소명해야 한다는 것처럼.
술에 한껏 취했을 땐 신나게 온 집안사람들을 한 번씩 부르기도 한다.
얼마 안 가 순애에게 한두 소리 듣고 안방에 들어가지만.
현우는 평생 전기기사로 성실하고 꾸준하게 맡은 바 일을 다하며,
자식 넷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키웠다. 퇴직하고도 쉬지 못하고 경비로 일했다.
나는 머리가 클수록 현우에게 배움에 대한 결핍이 있다는 걸 얼핏 얼핏 느꼈다.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오래 못 이어간 게 그의 마음에는 항상 남아있는 것 같았다.
현우는 성실성으로 수많은 것들을 이루어냈지만,
배움의 결여는 성실성만으로는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 것 같았다.
그런 그가 학교에 다닌다니 어쩐 연유인지 듣기도 전에, 우선 두 손 두 발 들고 반가웠다.
어르신 학교?
저번 주인가, 저 저번 주부터 시에서 운영하는 어르신 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학생 수도 꽤 되는지 반도 나눠져 있다고. 정확하진 않지만 현우는 4반이라고 했던 것 같다.
과목도 국어, 영어, 컴퓨터 등 다양했다. 순애는 집 아저씨가 심심했을 터라 잘 됐다고 했다.
입학 경쟁이 센 편이라 운도 좋았다고, 그래서 더 잘 됐다고.
현우는 말없이 부엌 식탁에 앉아 여러 종이 뭉치들을 펼쳐놓고 연필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방해될 것 같아 흘깃했다.
그 모습을 본 순애는 숙제하고 있는 거라고 크게 크게 말해줬다.
밥은? 저녁은?
순애가 묻고, 나는 친구들과 닭볶음탕을 먹고 왔다고. 너무 배부르니 괜찮다고 말해줬다.
누구와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 천천히 소상히.
아들 밥 차려 줘~
같은 공간에서 그렇게 말해도, 현우는 늘 ‘아들 밥 차려 줘~’하고 순애에게 말한다.
내가 안 먹을 걸 아는 그녀는 매번 이렇게 답한다.
먹고 왔댜!
매번 비슷한 풍경 속에서, 바뀌지 않는 밥 인사가 오고 간다.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에 가 보니 현우는 아직 숙제 중이었다.
물을 마시러 부엌을 지나가려는데 그가 돋보기안경을 쓸어 올리며 날 불렀다.
보니 키보드 자판을 가리키며 몇몇 부분이 어렵다고 알려달라고 하는 거였다.
곧 시험인데, 자꾸 까먹는다고(시험은 애국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타이핑하는 거였다).
현우가 어렵다고 한 부분은 대개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키였다.
엔터와 스페이스바와 캡스록과 백스페이스 같은 것들.
어떻게 해야 그가 키보드의 특수기능 키를 쉽고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고심 끝에, 해당 키가 직접적으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메모해 붙여주는 게
이해가 쉬울 거라 판단했다.
또 하나 문제는 키 하나하나의 공간이 좁아, 한정적인 글자 수로 의미 전달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해서 엔터에는 줄 바꿈, 스페이스바에는 띄어쓰기, 캡스록에는 쌍, 백스페이스에는 지우기를 붙였다.
키보드를 받은 현우는 좋다고 했다. 나는 설명을 몇 분간 더하고 소파에 누웠다.
느리지만 또박또박 자판 소리가 들린다. 이날 부엌 불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