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딘가에는 써먹겠지
피처폰 시절 엄마 순애는 종종 휴대폰 안에 노래를 넣어달라고 했었다.
노래를 넣어달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요샌 사람들이 전화기로 노래도 많이 듣더라? 요즘 전화기에는 다 들어가데.
늘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낸다. 여기에는 순애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예전에는 몰랐었다).
‘나도 듣고 싶으니까 노래 좀 넣어줄래?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같은 게.
그럼 나는 이미자 선생님의 동백아가씨나 섬마을선생님 같은 곡들을 넣어줬었다.
스마트폰으로 바꾼 후로는 유튜브가 그것을 대신해 주고 있다.
다만 폰 화면이 꺼지면 노래가 안 나오는 게 불만이라고 어느 날 얘기했었다.
그 말을 듣고는 프리미엄을 들면 폰 화면이 꺼져도 소리가 나온다고 ‘프리미엄 들어줄까?’ 말해봤지만
순애는 괜한 돈 쓰지 말라며 됐다고 했다.
순애는 손녀 원이를 봐주러 평일 내내 아침 일찍 버스를 탄다. 원이는 내 조카다.
그녀의 대전 집에서 막내누나 집까지는 거리가 꽤 되니까 적게 잡아도 30분 정도는 타고 갈 텐데,
버스 좌석에 앉아 어떤 표정으로 그 시간을 보낼지 잘 그림이 그려지진 않는다.
그러고 보면 순애와 함께 버스를 탄 건 정말 어렸을 때뿐이니까 그럴 만도 한가.
순애는 버스 안에서 처음 만난 아줌마들과 수다도 잘 떤다.
가끔 버스에서 들었던 누군지도 모를 아주머니 아들의 시험 합격 소식부터
딸아이의 결혼 뉴스까지 전해 듣곤 한다.
이런 친밀감은 언제 어떻게 습득한 걸까. 나이를 쌓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일까 궁금하다.
어느 날은 대전 본가에 내려와 소파에서 늘어지게 쉬고 있는데, 순애가 대뜸 영화 얘기를 꺼냈다.
그녀와 영화 얘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새삼 놀라며 귀를 기울였다.
밥정 알어? 영화 밥정.
밥정… 뭐지? 무슨 영화지?
순애는 ‘KBS 영화가 좋다’에서 밥정이란 영화 소개를 우연히 봤다고 했다.
그게 너무 보고 싶고 재밌어 보여서 나에게까지 말을 꺼낸 것이었다.
찾아보니 박혜령이란 분이 감독이고, 임지호 셰프란 분이 나오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였다.
개봉한 극장이 있을까 싶어 찾아봤더니 당시엔 개봉 전이라 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순애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직접 예매를 해본 적도 없고
나는 서울에서 회사 생활을 하니 얘기를 해볼 수 있는 건 막내누나뿐이라,
막내누나에게 밥정이란 영화에 대해서 말을 해놨다고 했다.
원이 봐주고 나올 때, 포스트잇에 ‘밥정'이라고 쓰고 나왔어. 그 정도면 원이 엄마도 보고 알겠지?
응?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알아? 봤다고 쳐도 엄마 의도를 어떻게 알아?
그냥 막내누나한테 보고 싶다고 말하라고 말하라고 했다.
순애는 대놓고 말하기에는 뭔가 미안하다고 말했다.
걔가 요즘 바쁠 텐데…
그 모습이 좀 답답하고 화나서 어쩐지 서글펐다. 순애의 언어는 화나고 슬프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순애의 언어 속에서 나의 모습이 슬쩍슬쩍 엿보이는 것 같아 불편함일지 불쾌함일지 분노감일지가 든 적도 있다. 아무튼 그때는 가슴에 열불이 터졌었다.
순애는 아직 밥정을 보지 못했다. 찾아보니 넷플릭스에 있었다. 아마 조만간 대전 본가에 내려갈 것이다.
그녀에게 얼른 밥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