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딘가에는 써먹겠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회사를 나와 잠시 쉬고 있다. 사정은 정말 다양했기에 콕 집어 이유를 댈 수는 없다. 아니 나름 정당한 이유로 쉬고 있다고, 주위의 한숨을 차단할 목적으로 그렇게 사정사정 들먹거리는지도 모르겠다. 변변찮은 사람으로 남아버릴까 하는 초조함에 안 그래도 조금 불안하니까. 아니 조금보다 좀 더 많이 불안하긴 하다.
사직서 퇴사 사유란에는 ‘일신상의 사유'라고 손쉽게 써냈다. 무엇도 밝히지 않으면서 무언가 사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은 영문모를 사유. 사직서 양식에는 당구장 표시와 함께 사유를 자세히 적어 달라고 적혀 있었지만, 구태여 더 보태진 않았다.
쉬면서 느낀 거지만, 쉰다는 건 많이 좋고 조금 불안한 활동이라는 거다. 사실 어떤 날은 그 조그맣던 불안감이 나를 삼키려고 덤벼드는 때도 있다.
우라질!
그럴 때면 우라질! 을 뱉으면 한결 낫다. 그러고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고 잠을 자버린다. 눕기만 하면 잠을 잘 수 있는 나만의 불안감 파훼법이다. 오복 중 하나가 잠이라고 했던가. 그 하나는 타고난 것 같아 다행이다.
이 여유가 언제까지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더없이 좋다. 쉼이란 무얼까. 쉼이란 무언데 이렇게도 좋은 걸까. 물론 쭉 이렇게 쉴 수만은 없다. 전세대출 이자도 내야 하고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도 나간다. 산책길에 눈에 띄는 카페에서 커피 마실 돈도 필요하다. 새삼스럽지만 돈도 좋다. 돈이란 무언데 이렇게도 좋은 걸까. 그리고 왜 늘 부족한 걸까. 생활에 윤택함을 주지만, 가지려면 시간이 피폐해지는 돈. 아! 아무튼.
쉬는 동안 별일이 없으면 도서관으로 출퇴근을 하려고 한다. 아니 등하교인가. 아니 그냥 어슬렁인지도 모르겠다. 도서관에 가려고 주변 도서관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 서울에는 도서관이 곳곳에 참 많고 잘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시에서 운영하는 곳부터 구에서 관리하는 곳까지. 그간 세금을 낸 게 이런 혜택을 누리려고 그랬던 걸까 싶기도 하다.
집 근처에는 동대문도서관과 성동구립 청계도서관이 있다. 둘 다 미리 둘러봤다. 시설도 괜찮았다. 단지 개인적으로는 도서관의 그 끝없는 조용함이 답답해질 때가 있다는 것 정도.
두 곳을 번갈아 다닐 생각이다. 텀블러에 카누 미니 마일드도 타고. 그럼 카페 갈 돈도 아끼고 홀짝이며 마시면 반나절은 입도 심심하지 않을 테다. 1시간 집중, 10분 휴식. 나름 루틴도 미리 짜놓았다.
쉬다 보니 또 느낀 건, 하루하루가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거다. 아니 짧다. 특히 끼니를 챙기다 보면 하루는 금세 간다. 아침 먹고 보면 점심이고, 점심 먹고 보면 저녁이다. 저녁 먹으면 해가 저문다.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싶어서 한 끼 정도는 안 먹기로 했다. 또 하루는, 자취방에 먼지를 좀 주웠을 뿐인데 하루가 다 간 적도 있었다. 정말 진짜로! 분명 하루를 살아냈는데 한 것은 없는 매일매일이 그렇게 몇 번 지나갔다. 마냥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어 고민 끝에 도서관에 가는 루틴을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는 타임라인에서 잠시 나와 시간의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안심찮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아의 풍요로움도 가져다주는 것, 쉼.
일할 때 맞는 주말도 값지고 소중했지만, 그만큼 보람 있게 보내려다 보니 피곤해질 때도 있었다. 지금의 나에겐 평일도 주말도 모두 평등하니까, 더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 같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다 늘어난 티셔츠 같은 시간. 언제까지 이 생활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좋을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