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딘가에는 써먹겠지
며칠 전부터 보이던 감기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역시나, 점점 몸의 힘이 축 빠지고 열은 끝도 없이 올랐다.
37℃... 38℃... 39℃...
그날 밤 39.4℃가 찍힌 온도계를 보고 나서야, 뒤늦게 병원에 가야겠다는 정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집 근처 내과에 갔다. 간호사는 접수자가 많아 대기시간이 오래 걸리니,
바로 옆 이비인후과를 추천해 줬다.
요즘 독감이 유행인 거 아시죠? 독감이에요.
코로나 전에는 이게 제일 무서운 병이었어.
이비인후과에서 검은테 안경을 쓴 의사 선생님은 친절한 듯 사무적인 듯 말했다.
타미플루와 기타 약을 처방해 줄 테니 경과를 지켜보자고,
타미플루의 부작용에 대해서도 일러 주었다.
그중에 환각 증세, 몽유병이란 말이 좀 무서웠다.
최근에 본 영화 <잠>의 장면장면들이 제멋대로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얼른 이 열과 아픔을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중고등학생 때 나는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집이 아닌 곳에서 음식을 먹을 때면 부담이 덜 되는 걸 찾았다.
컨디션이 괜찮은 날에는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열에 다섯은 반드시 탈이 났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집에서 저녁을 먹고, 유독 크게 탈이 났었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 위장을 꼬고, 푹푹 찌르는 것 같았다.
참으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배를 부여잡고 끙끙댔다.
저녁 먹고 쉬고 있던 아빠 현우는 얼른 병원에 가자며 안방에서 나왔다.
집 근처에는 내가 자주 가던 양내과라는 의원이 있었다.
걸을 만한 거리였기에, 현우와 나는 양내과까지 걸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나란히.
노을이 지는 하늘이었다. 두 그림자는 둘도 됐다가 하나도 됐다가 한다.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말을 건넸다.
많이 아프냐~ 업혀.
배 주변을 손으로 쓸며 걷는 내가 줄곧 신경 쓰였나 보다.
그는 쭈그려 앉아 등을 내어줬다.
난 그게 순간 창피스럽고, 왠지 쪽팔렸다. 당시에 난 내가 다 컸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아빠 등에 업히는 꼴이 볼품사나워 보일 거라 어림했다.
근데 또 아프긴 아파서, 업혔다.
발육이 늦는 나였지만, 그래도 꽤 무거웠을 텐데. 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양내과로 걸었다.
따뜻했지만 낯간지러웠고, 가는 길에 같은 반 친구가 볼까 노심초사였다.
양내과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더 일찍 닫혀 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는 위도 장도 별 아픈 기색은 없었다.
나는 걸을 수 있었지만 왜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현우의 등을 잠시 빌렸다.
하늘은 파란 밤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