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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휴자 Dec 29. 2023

엄마의 꽃 잠옷

#7 어딘가에는 써먹겠지

1950~60년대 섹시 아이콘 마릴린 먼로가 샤넬 No.5를 입고 잤다면, 

엄마 순애는 꽃을 입고 잔다. 꽃무늬 잠옷.


대학생이 되고 했던 첫 알바는 구청에서 하는 간판 조사였다. 일정 구역을 배정해 주고 그곳에 간판을 전수 조사하는 알바였는데, 하는 내내 정말 재미라곤 1도 없었다. 날은 거의 매일 더웠고 떡집 할머니는 나를 박대했고, 빵집 아저씨는 계란을 던지려고까지 했다. 그렇게 땀 흘려 받은 첫 알바비로 아빠 현우와 엄마 순애의 잠옷을 샀었다. 왠지 일해서 받은 첫 급여로는 잠옷을 사야만 할 것 같았다. 어디선가 봤고, 누구에겐가 들었었다. 부모님 잠옷을 사야 한다고. 물론, 순애의 꽃무늬 잠옷은 이때 내가 사준 건 아니다. 그 잠옷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가 주로 입는 잠옷은 꽃무늬 잠옷이다. 그녀가 말하길, 이 잠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50년도 더 된 잠옷이라고 한다. 상의와 하의 모두 연한 분홍색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오밀조밀 꽃들이 함빡 피어있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아가씨가 아내가 엄마가 되는 시간 속에서도, 계절이 수십 번 바뀌어도, 지지 않을 그 꽃들을 순애는 언제 처음 만났을까. 50년도 더 된 잠옷이라면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소녀티가 많이 묻어있을 때였겠지. 아빠 현우의 선물이었을까. 물으면 알게 되겠지만, 더 묻거나 물음 하지 않고 대중으로 생각한 그대로 마음에 둔다.


50년은 됐지만 생각만큼 해지진 않았다. 그걸 보고, 순애의 잠버릇을 짐작해 본다. 기억하건대 그녀는 잠버릇이랄 게 없다.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낳아 길러낸 순애에게 잠버릇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환할 때는 애들 키우느라 바빴고, 어두울 때는 잠자기 바빴을 테니.


다소 고집스러운 현우에게 시집을 와, 딸만 셋 낳을 동안 그렇게 시댁 눈치를 봤다고 들었는데, 그 눈칫밥을 먹으며 보냈을 기나긴 밤들을 나는 짐작하기도 버겁다. 다만, 그 밤을 함께한 게 꽃 잠옷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꽃은 지지 않으니.


기억해 보면 중고등학교 때, 아침밥을 하던 순애는 대게 꽃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 잠옷을 입고 된장찌개와 김치찌개와 콩나물국과 감잣국과 고등어구이와 갈치구이로 가족을 먹였다. 할머니의 집고추장으로 한 요리도 먹이고 외할머니가 해놓고 간 꽃게탕도 먹였다.


꽃 잠옷을 입고 여름밤에는 홑이불을 폈고, 모기향을 피웠다. 간간이 수박을 쩌적 깨어 시원 생생한 향을 온 집안에 퍼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내 입안은 수박과 수박물이 와그작 흘러넘쳤다.

겨울밤에는 솜이불을 폈다. 호박 고구마와 물 고구마와 밤 고구마를 삶아 먹기도 했다.

순애와 누나들은 김치와 함께 단짠단맵 조합으로도 먹었다.


켜켜이 쌓여진 일상들. 어쩌면 꽃 잠옷의 섬유 깊은 곳에는 그때의 음식 냄새와 이불 냄새와 모기향 냄새와 수박 냄새와 김치 냄새, 현우와 순애와 누나들과 나의 고유한 체취까지 섞여 우리 집 냄새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를 박고 킁킁대면 선명히 그때가 살아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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