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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휴자 Jan 08. 2024

아 맞다 우산!

산책하며 만난 안내문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길을 되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우아하게 시간을 잃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


다비드 르 브르통의 문장을 만난 건 한 달 전쯤이었다. 걷는 걸 즐기기에 휴대폰에 메모해 뒀다. 걷는 건 곧 산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때때로 나는 산책하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하고 마음의 감정을 다잡기도 한다(브르통의 문장처럼, 나의 길을 되찾아갔는지 우아하게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 가게 간판이나 안내문을 보고 다니기도 한다. 이게 소소한 재미가 쏠쏠한 편인데, 그렇게 만났던 기발했거나 마음이 동했던 안내문을 몇 개 소개해보고자 한다.


보라매역 근처에서 방을 얻어 살 때다. 날은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선선해서 산책을 하기에는 제격이었기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느닷없이 커피가 마시고 싶어 졌고, 근방에 있는 투썸플레이스에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창밖도 보다가 폰도 보다가 멍도 때리다 일어났다. 그렇게 나가는 출입문에서 이 안내문을 만났다.

<아 맞다 우산!>

딱 5글자로 전하는 당부. 언어의 경제적인 면에서 괜찮다고 생각했고, 짧아서 단숨에 읽히는 명쾌함과 그럼에도 온전히 전달되는 분명함이 탁월하다고 느꼈다. 안내문의 위치도 어른의 눈높이에 자리하는 섬세함까지 갖췄으니, 이 안내문을 쓰고 붙인 사람의 배려가 가득 느껴져서 괜스레 흡족했다(덧붙여, ‘앗! 우산'이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또 한 곳은 압구정에 있는 밥집의 안내문이다. 팥죽과 콩국수와 장칼국수 등을 파는 맛집인데, 이 앞을 지나다 본 X배너가 눈길을 잡았다.

<팥빙수 단팥죽 호박죽 앙버터 팥물, 자신있습니다>

‘맛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집’, ‘2등으로 맛있는 집’은 꽤 본 것 같은데 ‘자신있습니다'는 처음이었다. X배너의 이 문구에는 주인장이 지향한 맛을 구현해 내기 위한 그간의 고집과 타협 없는 억척, 재료를 선별하는 세심한 눈과 땀 흘리며 요리하는 장인의 손이 그려졌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 나는 이 집에서 하는 콩국수와 장칼국수를 애정한다.



다음으로 소개할 안내문은 산책하다가 본 건 아니다. 몇 년 전 온라인에서 발견해 저장해 둔 안내문이다. 신기하게도 이 오프라인 안내문은 온라인 게시물의 댓글창 같은 기능도 겸하고 있어서 재밌다.

<내 국밥 내놔라, 많이도 쉰다, 내 국밥 돌리도>


대체 뭐가 든 국밥이길래 저렇게까지 할까. 보면 볼수록 맛이 궁금스럽고, 그 궁금함은 점점 커져가기만 한다. 왠지 실패할 것 같지도 않다. 어디 다른 국밥집이라도 가서 뜨끈하게 한 그릇 하고 싶은 안내문이다.


요즘은 날이 차다. 칼바람이 아니라 공기 자체가 냉동고다. 이 추운 게 지나면 찬찬히 산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슬아 작가의 책 일간 이슬아 수필집에서 먼저 만났던 로베르트 발저의 책 산책자의 일부를 옮긴다.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로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내가 산책을 못 하고 산책길이 알려주는 신고를 받지 못하면 세금 신고도 더는 없을 것입니다. 소설은커녕 아무리 짧은 글도 더는 쓸 수가 없을 테니까요. 산책을 못하면 관찰을 하지 못하고 연구도 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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