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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휴자 Mar 29. 2023

엄마가 베란다에 스티커를 붙이는 이유

사소하지 않은 사소함 #1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 작년까지만 해도 왕왕 내려왔었던 것 같은데 타지 생활이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이런 날 보고 친구는 ‘게을러서 그렇지 뭐.’라는 말로 내 나름의 고충을 퉁 쳐서 매도해 버렸다. 대머리 자식(실제로는 풍성풍성하다).


본가에 오면 엄마는 보통 삼겹살을 구워준다. 아파트 텃밭에서 직접 키운 쌈들도 식탁에 올린다. 이때 올라오는 쌈들은 참 신기하게 생긴 게 많다(내 눈에만 그렇겠지만). 대부분 상추 모양새를 기본으로 크기나 색깔, 디테일한 형상이 조금씩 다르게 베리에이션 된 쌈들이다. 향도 약간씩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쌈에는 과문하여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 이 쌈들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게 된다면 나는 다 상추라고 답할 게 뻔하다. 엄마는 이름을 뭐라 뭐라 하는데 여러 번 들었음에도 늘 까먹는다. 한결같은 내 기억력. 어쨌든 채소는 몸에 좋고 살도 안 찌니 많이 많이 먹으라고 엄마는 매번 똑같은 멘트로 마무리 짓는다. 이 멘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오래도록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데, 그렇게 보면 인생에서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기를 쌈 해 입에 넣다가 우연히 베란다 창문에 눈이 닿았다. 무언가 눈에 걸렸다. 가만히 보다가, 가까이 가서 봤다. 설마, 설마! 벌레인 줄 알았는데 스티커였다. 누가 한 짓일까….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가 이내 조카가 했을 것이란 결론에 다다랐다. ‘책임 없는 쾌락을 부리다니 이놈’. 긁어서 스티커를 떼야 되나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엄마, 이거 떼?”

“뭐?”

“이거 스티커. 리원이가 그런 거야?”

“그거 내가 붙인 거야.”



엄마가 스티커를 왜? 이유를 들어보니 베란다 창문에 자꾸 부딪혀서 스티커를 붙여놨다고. 구분을 위해 붙여놓은 거긴 한데 그 말에는 나이 듦이 느껴졌다. 온몸에 씁쓸함이 내려왔다. 내가 어렸고, 엄마는 더 젊었을 때 스티커를 붙이는 건 나였고, 그걸 떼려는 건 엄마였었는데. 다른 이유로 이제 엄마가 스티커를 붙이고, 그걸 떼려고 고민하는 건 내가 되어 있었다.


작년부터 간 수치 검사를 받고 있다.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만 높게 나온 거다. 그 후로 집과 회사 주변 내과에 여러 번 찾아가 피를 뽑았다. 간 수치는 매번 여전했다. 이후 간장약을 처방받고, 혼자 끼니를 해결할 때는 탄단지(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비율을 나름 엄근진 하게 따져 한 끼를 선별했다(안 지켜지는 날이 더 많았다는 건 비밀. 아는 맛이 제일 무서운 것이다). 엄마가 베란다에 스티커를 붙여 부딪히는 걸 방지하듯, 나는 내가 먹을 음식의 탄단지 비율 스티커를 붙여가며, 비교하고 끼니를 선별할 나이가 된 거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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