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엔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사진 속 나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미국에서 온 고모부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게 친가 조부모와 외가 조부모가 다함께 찍은 사진은 그것이 유일하다. 촬영을 한 것은 아마 둘째 고모일 것이다.
을지로에서 커피 가게를 시작한 직후 부모님으로부터 이 사진을 받은 나는 일종의 성상 내지 부적처럼 지척에 두고 있다. 을지로 가게에선 커피를 내리는 작업대 바로 뒤에, 지금의 안암동 가게에선 로스팅 룸 벽에 액자로 걸어두었다.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온가족이 함께 하는 기분이 든다. 사진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사진 속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모두 현재는 돌아가시고 더 만날 수가 없다. 외가 쪽이 먼저 소천하셨고, 친할머니가 가장 최근에 떠나셨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코로나 펜데믹이 한창이던 해 신년 1월 1일 새벽이었다, 나는 삶에 있어 후회를 남겨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할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숱하게 했던, 결국은 공염불로 남은 약속에 대한 죄스러움이 컸다. 그렇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나만의 길을 찾는 과정 중에 도달한 커피 가게. 친할머니는 살아 생전 걱정이 많으셨다. 홀린 듯 개업을 하고 얻어맞는 심정으로 장사를 배워갈 때,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싶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치루고 다시 돌아온 가게에서, 나는 정말 이상한 경험을 했다. 한산한 오후,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는데 열린 문틈 너머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입구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할머니가 영원한 세계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게에 들려 손자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가셨다는 기분을, 솔직히 말하자면 모종의 확신을 느꼈다. 증명할 방법도 없고, 또 그렇다고 내가 평소에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 편도 아니나 그것이 맞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한참 전부터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 침대 반경 10미터를 떠나지 못했다. 게다가 첫 가게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좁은 계단의 3층 건물이었다.
이후 가게는 운이 정말 좋았다, 는 표현 외엔 적당한 묘사가 없을 만큼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커피에 대한 지식이나 실력, 심지어 열정조차 부족한 사람이 주인으로 있는 작은 가게가 후딱 망하지 않고 지속적인,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방문이 뒤따른 건 가족들의 물심양면이 크다. 아내와 부모님의 지지 뒤에는 먼저 떠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다. 특히 친할머니는 하늘에서도 지상의 운명을 관장하는 담당자를 채근하며 “우리 손자 가게 좀 잘 봐줘요” 하고 목청을 높였을 것이다. 나는 그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선연하게 들리는 듯하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길엔 괜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지만 정작 통화는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하던 전화였음을 한참 뒤에서야 깨닫는다. 우리의 대화는 대개 별 내용이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에 그저 존재함을 확인하고 감사하던 통화였다. 그 전화가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