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풀어나갈 때 유용하다. 먼저 눈앞의 커피 잔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어색한 순간에 찻잔 안으로 시선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두 손을 컵 허리에 얹어놓을 수도 있다. 적당한 맞장구가 떠오르지 않을 때 잔을 들어 커피 한 모금 마시는 시늉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한편으론 고역스러운 게임의 한 턴을 안전하게 모면하게 해주는 도움책이기도 하다. (이 같은 사회적 연기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안도감을 준다)
커피의 쓸모는 비단 도구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커피를 앞에 두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기는 행위 대부분을 포기한다는 뜻이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먼저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의 각성 효과는 의식을 한층 명료하게 해준다. 졸음을 쫓을 수도 있고, 복잡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게 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커피 대신 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떤가. 상상만으로도 파국이다. 카페인 말고 알코올이 주는 담대함, 일체감, 연대 심리 또한 의사소통에 이바지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연거푸 들어가는 술잔에 또렷했던 의식은 점차 무뎌지고, 말투는 부정확해지며 톤이 높아진다. 감정이 증폭되면서 합리성보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그 순간부터 사회적 대화는 중단되고 ‘혼자만의 대화’가 시작된다.
무엇보다, 커피라는 음료를 마시는 행위가 지닌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고대 에티오피아의 열대 우림에서 아라비카 열매가 발견된 것도 부족 간의 전투와 노예 교환이란 사회적 행위 중에 비롯된 결과였다. 커피가 아프리카 부족 사회에서 이슬람 제국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파된 것도 순전 무역과 전쟁 덕분이었고, 식민 자본주의란 근대 유럽의 아이디어가 싹튼 장소 또한 바로 커피 하우스, 살롱이다. 에티오피아처럼 커피를 종교나 정치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문화도 있으나(고대 에티오피아 사회에선 일찍이 커피를 전문으로 내리는 직업이 존재했다. 또한 오늘날까지 에티오피아 사회에서 커피란 종교적 의식 차원을 동반한다) 대개 커피는 인류 문명사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주로 함께 해왔다. 안과 밖,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혼자 있는 개인과 집단 속에 함께 하는 상태라는 구분항에서 커피는 후자 쪽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해왔다. 커피는 사회 생활의 시작이고, 절정이다. 우리는 일과를 시작할 때 커피를 마시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사회적 관계를 쌓을 때 커피를 마신다. 이런 맥락을 생각했을 때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저 “카페인이 고함량으로 녹아 있고 산미와 향이 느껴지는 검은 물”을 음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개인이었던 존재가 공적 수준, 그러니까 사회란 필드에 나왔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안전하고, 쿨하게.
우리는 항상 개인 주체(‘나 자신’이라 믿는) 속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아 없이 사회적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주체의 상태는 스위치로 조작하듯 옮겨진다. 혼자 있을 때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이를테면 친구나 직장 상사, 동료들을 대할 때의 내 모습은 분명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나 자신이 있는 ‘장소’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역할 수행은 본능적이기도 하고, 자발적이기도 하지만 관습에 의한 강제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모순이다. 독립된 개인으로서 나만의 개성을 촉구하고 장려하는 사회는 정작 관료화된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사회 구성원들을 표준화하지 않으면 운영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나'와 '사회적 자아'의 구분을 엄밀하게 하고, 필요할 경우 다양하게 세분화하여 모순에 적응하려 한다. 그러한 자아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것이 커피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적이나 세레모니처럼 비단 개인적 믿음에 불과할지언정, 커피는 ‘나’로 하여금 ‘사회적 자아’로 행동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과장하자면 사회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커피는 어디까지나 독립적이어야 하는 ‘나 자신’인 개인 주체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플레이어로서의 상태 그 가운데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술은 정반대의 기능을 한다) 커피가 있음으로써 “따로 또 같이(alone together)”가 가능하다고 표현하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적어도 내게 있어 커피는 그러한 의식의 경지에 이르러서, 커피 없이 사회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다. 커피의 위상을 다소 거창하게 묘사했는데, 만약 이것이 내 개인의 상상이 아니라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또한 공감하는 구석이 있다면? 그리고 커피가 “타인과의 소통”이란 불가능한 작전을 멋지게 해결해주는 마법을 제공한다면? 놀랍게도 이것은 한낱 뜬소리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커피는 실로 그러한 힘을 갖고 있다.
커피가 있는 자리에선 유연한 대화가 쉽게 이루어진다. 무거운 소재가 아니더라도 좋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날씨 얘기도 좋다. 오히려 선을 넘지 않는 시시한 대화가 커피와 더욱 잘 어울린다. 오늘 날씨가 정말 환상적입니다, 같은. 그래야 다음에 돌아오는 답변도 쉬워진다. 핑퐁에 비유하자면, 구석 자리를 향해 찔러넣는 날카로운 스매쉬가 아니라 상대방 사정거리에 느릿느릿 보내는 랠리 같은 것이다. 우리가 전에 만난 적 없이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는 사이임에도 불구, 다른 곳에선 상상조차 하지 못한 소통이, 커피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네요, 저도 구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커피는 인연의 첫 출발이다.
술을 마실 때에도 이런 유사한 경험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질적으론 커피와 다르다. 술은 곁들일수록 소통을 닫아 버린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상대방을 향해 말을 한다고 ‘열린 소통’이 아니다. 나의 마음을 전하고,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소통의 목적이라 했을 때 술은 자꾸만 방향을 잃는다. 술이 있어야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알코올 영향 하의 소통은 이미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나는 커피나 술의 성분 혹은 신체에 끼치는 화학적 차원의 영향력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통과 사회적 관계 형성에 있어 커피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커피를 통해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설명하려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선 커피 그 자체를 넘어 커피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환경을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커피에 축적되어 있는 의미들을 헤어리기 위해선 커피를 만들고 마시고 즐기는 경험 전반을 입체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백 명의 사람에게 커피를 즐기는 백 개의 방법이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커피를 마실 땐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잠을 쫓기 위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식사 후 입을 개운하게 하기 위해, 대화를 하기 위해 등등. 이 같은 '커피의 목적'에 대해 나는 “어떤 상태의 변화를 위한 스위치”라고 표현하고 싶다. 개인 주체에서 사회적 자아로.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그 가운데 머물 때에도 우리는 커피를 필요로 한다.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일상을 시작하고, 커피를 통해 일과를 구분한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 만큼은 최소한의 안전 영역이 보장된다. 그것이 작은 사무실 책상 위일지라도, 어수선한 창고 현장 가운데라도, 커피가 있는 곳은 업무와 계약 내용으로 점철된 사회 생활과는 분리된 중간 지대가 되어 한숨 돌릴 수도 있고, 동료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심리 안에서 기능하는 임의적인 장소성일 뿐 법적이나 물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상상은 어디까지나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커피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커피를 마실 때 느끼는 이러한 경험은 보편적인 것이다. 즉, 커피는 주체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장치(스위치)이자 사회 내부에 만드는 안전 지대의 기능(장소성)을 제공한다. 뭔가, 엄청난 것이 벌어날 것 같지 않은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