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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하 Aug 13. 2024

내 자리


커피 가게를 연지 3년이 지났다. 매출 성적은 아슬아슬하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 그 짧은 새에 가게 자리도 한 차례 이동하는 큰일도 치뤘다. 첫 가게는 오피스와 제조업 공장들이 뒤섞여 있는 구도심, 현재 가게는 큰 학교가 있는 거리에 있다.


커피 가게에 있으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지만 주된 업무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얼마 전 가게에 혼자 있을 때 무슨 볼일이 생겨 부재 중 알림을 세워놓고 골목 건너편 상점을 다녀왔다. 돌아온 직후 손님이 찾아왔는데, 뜨끔했다. 만약 자리를 비웠을 때 오셨다면 헛걸음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너무 경솔하게 자리를 비웠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내 자리를 잘 지켜야 하는데. 


그렇다. 내 자리. 직업을 ‘사회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수행할 자리’라고 정의하다면 나는 커피 가게라는 지금의 자리에 전적으로 만족한다. 욕심을 내자면 가능한 아주 오래, 오랫동안 이 일을 하고 싶을 정도다. 연간 벌어들이는 수익, 사회적 명성이나 타인의 평가와는 별개로 현재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다. 


사실 직업이란 마침 운 좋게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가 우직하게 엉덩이를 내리깔고 버티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마음이나 열정만으로 영위되는 것도 아니다. 커피를 다루는 직업이라 한다면 첫째도 커피, 둘째도 커피다. 말로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붙이는 건 자유지만 커피 가게에서 커피가 맛이 없다면 그것은 살벌한 농담이다. 처음부터 나는 로스팅도, 커피 추출도 오롯이 나의 힘으로 해나가기로 정했는데, 어쨌든 값어치에 준하는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직업이 유지되려면 결국 이 자리를 지키려는 나의 의지와 기꺼이 돈을 지불하고 커피를 마시는 손님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을 시장 내 행해지는 ‘거래’로 국한해 봐도 좋고, 조금 넓게 해석해 ‘소통’이라 봐도 좋다. 직업이란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할진대, 내게는 그것이 ‘커피’였다. 좀 고루한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커피를 통해 타인과,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즐겁고 의미 있다고 느낀다. 정말 감사하게도, 다행히도 내가 볶고 내린 커피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가게에 온 분들께 맛있는 커피를 내려드린다. 커피 가게라는 직업에 대한 내 개인의 소명은 이렇다.


직업을 자리에 빗댈 때, 사회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줄곧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대학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가까스로 석사 학위를 받고 시작한 직장 생활과 잦은 이직 속에서 내가 확인한 것은 도저히 이곳은 내 자리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다.


누가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다. 회사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만도 아니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것은 차라리 사실에 가까웠다. 직장 상사나 동료가 어떤 말을 하든, 급여나 근무 환경이 어떻든, 내가 일을 잘 하든, 성과가 좋든, 그와는 상관 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은 ‘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순 없어도 강한 확신 속에 개인에게 구속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운명이라 말해도 좋다. 운명을 느끼는 건 내가 특출나게 감이 좋아서가 아니다. 과학적 언술로 논증할 순 없어도 느낌으로 어떤 존재를 지각하듯이 어떤 것은 그냥 아는 것이다. 누구나 다. 다만 애써 모른 척할 뿐이다. 


나도 처음엔 모른 척하고 싶었다. 이른바 높은 지위, 좋은 직장에서 사회적 위신을 누리면서, 명성과 권위를 확인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힘을 갖고 싶다, 는 욕망이 첫 출발이었으나 글쎄, 이런 순수한 의도가 현실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나중에는 스스로조차 무엇이 목적이었는지 완벽히 망각해버리는 사례는 흔하디 흔한 클리셰다.


더군다나 내겐 가족이 있었다. 가장의 의무감은 결혼 의례와 동시에 엄습했다. 그말인즉, 수틀리면 언제든 뒤로 내빼곤 하던 대학 시절의 졸렬한 히든 카드가 더 이상은 통용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와 아내뿐인 단촐한 2인 가족이었지만 어쨌든 생활을 위해 생업을 가져야 했다. 곧 납부 기한이 임박한 아파트 전세 대출 이자와 도시가스 요금, 카드비 고지서 앞에서 ‘여긴 내 자리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블랙 코미디 같다. 


오롯이 나만의 자리를 찾고 염원하는 것은 인간 보편의 욕망이자 권리일 것이다. 어린 시절, 박스 안이라거나 이불 속, 책더미가 만든 틈 속에서 온갖 상상을 동원해 나만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만들던 행위는 성장하면서 점점 사회적 장소로 이동한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스위치를 잔뜩 그려넣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박스 안 ‘나만의 공간’은 이후 과학자나 엔지니어의 실험실, 연구소란 현실의 특정 장소로 전치된다. 그런 차원에서 ‘내 자리’는 유아기부터 놀이 삼아 꿈꾸던 장소적 상상이면서 동시에 이상적 자아가 머무는 곳으로서의 사회적 장소로 전이된다. ‘내 자리’는 곧 ‘내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자. 밀린 카드 대금과 때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허기, 기타 다양한 욕구들이 아우성을 치는 현실 세계에서 ‘내 자리’를 찾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내 자리’는 근본적으로 나의 꿈, 나의 욕망, 나의 환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사회적으로 승화(!)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훈육의 결과가 ‘내 자리’를 꿈꾸는 것마저 금기시한다는 것이다. 


‘내 자리’와 ‘현실’, 답이 정해져 있는 양자택일의 세계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것은 대부분 현실이다. 현실은 말한다… 여기가 ‘네 자리’라고. 네가 해야 할 일이고, 맡아야 할 업무이고, 남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바라고 말이다. 현실의 욕망을 선택한 우리는 계약서의 서명을 한다. 그 결과 계약서에 명시된 근로 장소와 근로 시간을 철두철미하게 ‘내 자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계약이 성립된 이후로 더 이상 ‘내 자리’를 찾지 않는 것은 정말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기는 정말 내 자리입니까?


이것은 정말이지 모두를 동요하게 만드는 불온한 질문이다. 내가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모든 사람이 개탄했다. (아내 한 사람 빼고) 수많은 이유를 거론하며 이곳이 ‘네 자리’임을 설득하려 했다. 그럼에도 나의 의구심은 해소되지 않았다. 현실의 압박 속에서도 외려 더욱 강렬해졌다. 나는 그것을 ‘행복 추구권’이라 분명하게 느꼈다. 인간에게 부여된, 남이 보장해줄 수는 없을지언정 그것을 꿈꾸는 것마저 박탈할 수는 없는, 분리할 수 없는 자유로서의 권리. 이 생각에 도달하자 답은 명쾌해졌다. 


한 순간이라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곳은 내 자리가 될 수 없다. 

행복을 위해 내 자리를 찾아야 한다. 


항구적인 행복은 오로지 관념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보다 나은 조건으로 나아지길 기대하며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행복은 대상 그 자체가 될 수 없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을 향해 떠나는 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내 자리’임은 두 말 할 것 없다.


지금의 ‘내 자리’는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한 작은 점포 안이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이곳에서 보낸다. 온종일 사람들(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관련된 돈’ 문제겠지만)을 상대하던 직장 생활과는 달리 커피 가게에서의 일상은 몹시 단순하다. 생두들을 꼼꼼하게 고르고, 뜨거운 가마에 콩을 볶아내고, 천천히 내린 한 잔의 커피를 손님들께 대접한다. 이 과정에 말은 크게 필요치 않다. 찾아와주신 손님들에 대한 감사가 전부이다. 나는 이 단순한 생활을 사랑한다. 


지금 내가 지키고 있는 이 자리는, 오래 지속되길 바라지만,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가끔 어떤 자리는 시간이 한참 지나도 선연히 떠오를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렇게 마음 속에 새겨진 ‘내 자리’는 현실의 부동산과는 다르게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안전하고 편안하게 나와 남을 모실 수 있는 장소를 찾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아있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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