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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Mar 28. 2021

나 때는 말이야

어느 날 꼭두새벽부터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고 잠은 오질 않으니 몸이 뻑적지근하여 아침 운동 겸 걸으려는 심산으로 집 앞동산에 올라 정상을 한번 맛보고 나면 어느덧 그다음 꿈이란 조금 더 높은 산을 향할 테고 머지않아 한라산을 탐방하기 위해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은 으레 더 (지)독한 사람이 존재하기에 한발 더 나가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은 히말라야 둘레길(?)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순간에 이르면 현지에서 셰르파를 고용할지도 모른다. 늘 새로운 경험을 꿈꾸는 인간의 본성이기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꿈은 막을 이유가 없고 막을 권리도 없다(하지만 그 꿈을 지나치게 응원하면 가족이 힘들지도). 여하튼 우리는 가본적 없는 세상을 동경하고 언제나 새로운 경험을 갈망한다.


스스로 구성한 탐험대의 일원이자 대장으로서 그 목적이란 새로운 사람을 알기 위해 길을 떠날 수도 있고 더욱 훌륭하고 장대한 광경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우리는 더 높은 곳 그리고 더 깊은 곳을 향해 끝없이 도전한다. 이렇듯 가본 적 없는 그곳을 궁금해하며 무작정 떠나기를 꿈꾸지만 따지고 보면 그 꿈이란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것이었다. 지구는 둥글다며 입을 모으고 앞으로를 외치며 발을 모으던 우리들은 어쩌면 진작부터 세계로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꿈꿨던 것이다. 실제로 계획을 실천하고 말고 와 별개로 그 꿈이란 누구나 꿀 수 있는 것이고 모두의 꿈은 소중하며 응원받아 마땅하기에 행동으로 옮기는 도전이란 참으로 값지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이 반드시 몸으로 직접 할 필요는 없기에 때로 우리는 간접의 경험을 추구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한동안 서점가를 휩쓸었던 여행 에세이를 통해서 우리는 공항 근처는 얼씬도 안 하지만 그 지역에 대해 줄줄이 읊을 수 있고 여권을 굳이 펼쳐 보이며 증명할 필요가 없다면 '만국 유람'정도는 우리의 이력에 한 줄 추가될 수도 있다(물론 그럼에도 우리가 시험에 드는 그 순간이라면 절묘한 타이밍으로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이므로 거짓을 꾀하지 말지어다). 이렇듯 직접적인 경험에 대한 집착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채로운 경험을 해볼 수 있는데 물론 앞으로의 일뿐 만아니라 그 시간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며 과거로 향할 수도 있다.


구전 설화(혹은 경험담)가 대표적으로 해당이 된다. '누군가'께서 들려주셨던 '옛날에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그 이야기의 스케일이란 실로 장대하며 언제나 그렇듯 묘한 매력을 갖는다. 격동의 세월을 실제로 겪어낸 산 증인들이 들려주던 생생한 이야기로부터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고 몰랐던 사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듣다 보면 빠져드는데 이야기의 구성이란 흥미진진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시대처럼 오래된 이야기를 진작부터 즐기고 살았으며 심지어는 옆 나라의 삼국지와 바다 건너 섬나라의 전국시대까지도 궁금해하던 것처럼 과거의 일에 대해 여전히 알고 싶어 한다. 심지어는 생김새도 다르고 가본 적도 없던 바다 건너 나라의 일이 궁금할 때도 있지 않던가. 직접 과거의 현장(?)을 체험해보고자 전국으로 유적을 찾아 떠나고 세계로 눈을 돌려 과거 여행을 한다는 구실 좋은 핑계로 유럽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시간 여행인데 이 모든 일이 새로운 경험을 원하기 때문이다.


본인의 자랑이나 영웅담 또는 훈계의 목적으로부터 벗어나 (강아지 같은) 손주들에게 그저 들려주는 그 시절 이야기였기에 교훈보다는 정보의 전달로 국한된 말이었을 것이며 그렇게 전달되는 이야기라면 보통은 결론 없이 진한 여운만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때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거나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갑자기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일도 있었으니 애당초 '그래서'라든지 '그렇기 때문에'와 같은 '접속 부사'를 그 이야기의 마지막에 위치시키며 결론을 위해 '의도한 말'이란 없었다고 보는 편이 조금은 더 합리적일 것이다(적어도 나는 들을 때마다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 옛날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재미난 일도 있고 숨 가쁘게 전개가 되기도 했다. 일제 시대의 일본 순사를 피해 시골 산골에 숨어들어 수년을 버텨낸 일화나 정신없는 피난길에 겪은 살기 위한 몸부림을 들려주던 속내는 어쩌면 그저 '위로'를 얻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도 누군가에게는 '꼰대'(은어로써 늙은이나 선생님을 이르는 말)가 되어가고 있는 이 마당에 할 말은 아니겠으나 언제부턴가 저렇듯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대화에 종종 소환된다. 누군가와 함께 모인 자리의 대화가 말미에 이르면 꽤나 심각하게 결론이 등장하곤 한다. 그들은 일장 연설을 시작하기 전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먼저 풀고(얼마나 길게 하시려고요) 곧이어 바로 그 유명한 말인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의 본론에는 지난 시대를 살아낸 원인 모를 자부심이 짙게 깔려 있다. 그들은 보통 같은 에피소드를 두 번 세 번 주야장천 반복하는 게 일상이다. 본인애가 강하게 묻어나지만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 조부모님이 해주시던 옛날의 그 일만큼 강한 임팩트는 없지만 그래도 나쁜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 알겠다(물론 안 하면 더 좋지요).


'(네가 힘들다는 점은 알아. 그렇지만)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그 말의 결론이란 힘들어하는 상대방을 이해하며 괴로울 수 있는 감정에는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예전과 비교한다면 너무나도 좋아졌고 즐거움이 가득하며 열정을 쏟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xxx 해야 한다'처럼 자신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결론을 교육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어떤 목적에서든 이해하고 공감하는 그 능력이 조금은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결론의 목적이 '정보의 전달'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계몽'의 요소가 더해지는데 애정이 어려 있다면 그러한 교육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 스스로를 난세의 영웅으로 그려내며 그토록 힘든 시기를 살아내고 치열한 구국의 전투를 승리로 견인한 '일등공신'으로 인정하며 사는 부류이기는 해도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언행은 거칠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맛은 없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고 이해해주는 이들이므로 나쁜 감정만 가질 순 없다. 그런고로 나는 이런 이들을 (때때로, 자주는 아님) 좋아한다. 물론 딱 거기까지만 하면 말이지.


여기서 한발 더 나간 이들이 종종 있어서 문제가 된다. 그들은 보통 본인의 경험을 극구 강조한다. 단순하게 혼돈의 도가니였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에 더해 본인이 직접 해봤다며 유세를 부린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서론을 풀어내는 그들과의 대화는 좋지 않게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이들이 지난 일에 대해 품고 있는 경험에는 자부심을 뛰어넘어 상대방보다 본인 스스로를 '더 먼저 경험한 자' 혹은 '더 뛰어난 자'로서 정의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럼에도 간혹 상대방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위해 말머리에 급하게 끼워 넣는 의인들도 존재하니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제가 해봐서 아는데요, 이 일이 참 어려운 일이에요. 많이 힘드시겠어요."라고 말을 한다면 인간적인 면모가 남아 있는 사람이겠지만 이런 말을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일부러 상대방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해 문맥에 어울리지 않음에도 대화에 억지로 끌고 들어가니 항상 서로의 기분은 상하게 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거는 그냥 국민학교만 나오면 다 할 수 있는 거예요."라는 말이 위로로 들리기는 어렵다. 그렇게나 쉬운 일을 두고 뭐하고 앉아있냐는 정도의 핀잔이나 면박 정도로 의역하는 편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이쯤 되면 이제는 싸우자는 말로 들리고 가만히 있으면 그야말로 '가마니'가 될 수 있는 그 순간이다. '버럭'한번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바로 그 순간이다. 애초부터 인정이나 공감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누군가가 어렵사리 추진 중인 그 일에 대고 그런 말을 하는 의도라면 십중팔구 상대방을 짓밟음으로써 본인을 돋보이려는 심산이다. 이런 사람들과는 애당초 교류를 하지 않는 편이 결국엔 도움이 된다.


안타까운 일이라면 이쯤 되면 더한 유형의 사람이 나오지 않아야 정상임에도 이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한번 더 놀라게 하고 더욱 강한 사람이 여지없이 존재하기에 힘이 빠진다. 본인의 경험을 추켜세우는 것으로도 성이 차질 않아 상대의 경험과 연륜을 기어코 깎아내린다. "그들은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자고요."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존재하고 다양성의 측면에서 그러려니 할 수는 있지만 본인의 기준에서만 생각하며 주변의 사람들을 졸지에 '있으나 마나 한 투명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그들은 공감하거나 이해할 생각일랑 애당초 없다. 혹은 결론도 없다. 그저 (아몰랑) 무시해버린다. 상대방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본인을 되돌아볼 생각은 아예 없다. 그저 남들은 '강아지'나 '꿀꿀이'로만 아는 부류다. 지금까지의 경우와는 달리 본인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거나 상대적인 위치에서 본인을 앞세우려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항상 남을 깎아내리며 남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한다. 선택적으로 원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한다.


더 이상 양보와 겸손이 미덕인 시대가 아님은 자명한 사실이다. 본인의 경험을 비추어 얼마든지 으스대도 내게 피해만 없다면 혹은 내가 배울 점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또는 좋은 의도를 가지거나 상대를 배려해 말을 가려서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고 격려나 덕담까지 수반된다면 그것도 괜찮은 '꼰대질'이다. 하지만 본인의 알량한 경험만을 최고로 삼으며 그저 남들의 의견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그들이야 말로 꼰대 중의 '악질 꼰대'임에 틀림없다.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비웃는 자 아니던가. 그런 자들과 엮이지 않으려는 노력만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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