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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치다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

프롤로그-지금 시작해도 될까?

by 피터의펜

기타, 이게 뭐라고. 그저 잘 쳐보고 싶었다.

어릴 때도 그랬고, 내 나이 마흔을 넘긴 지금도 여전하다.

왼손과 오른손이 할 일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미친 듯이 줄을 튕겨낼 때, 그 소리는 정말 기가 막히다. 기타 반주에 감미로운 목소리를 얹어 라이브로 노래까지 부르면, 그 분위기란… 그야말로 자지러진다.


시작은 그랬던 것 같다. 김광석도, 양희은도 아니었다. 엄마의 8남매 중 막내 외삼촌. 그분이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와! 멋있다. 그야말로 가수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던 외삼촌과는 유독 친했다. 가까이 지내다 보니 부모님은 가끔 저녁에 마치 ‘찬스’라도 쓰듯 외삼촌을 불러 우리 삼 남매의 일일 보육을 맡기곤 했다. 그때마다 등장했던 것이 바로 기타였다. 외삼촌은 우리를 한강으로 데려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무심하게 기타를 치며 여린 미성으로 노래를 불러줬다. 그게 참 좋았다. 그게 내 인생 첫 기타 로망이었다.


하지만 그 무명 가수 같은 외삼촌도 곧 장가를 갔고, 우리는 더 이상 그의 라이브를 들을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사하면서 기타를 우리 집 베란다에 두고 가셨다. 기타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가장 구석에 자리한 채 묵묵히 버티는 그 기타는 한동안 우리 삼 남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살면서 몇 번은 용기를 냈다. 하지만 그때마다, 늘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공부는 못하면서도 "공부해야 하니까"라는 핑계로 기타를 내려놨고,

대학교 시절엔 기타 동아리 앞을 서성이다 입단 시기를 놓쳤다.

제대 후엔 ‘로망스’를 독학하려 했지만, 하필 사랑니가 자라는 통증에 손도 못 댔고,

슈퍼스타K에서 장범준이 정신없이 열창하던 시절엔 나도 육아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핑곗거리는 풍성했다. 시작은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닭칼국수 원조집에 가던 길에 우연히 버스킹을 하고 있는 중년 밴드를 보게 됐다. 그 순간,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더라. 기타를 오랫동안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정작 시작도 못 해본 채 살아온 내 인생이, 갑자기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튀어나왔다.


"이러다 진짜 기타 한 번도 못 쳐보고 죽겠는데?"


공부는 하기 싫다면서도 학원은 그렇게 다녀놓고, 기타는 평생 못 배우고 있다니. 고작 기타인데.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이전과는 다른 어떤 의지가 조용히 기지개를 켰다. 못 할 이유를 찾자면 수백 개는 찾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당장 먹고 죽을 돈도 없지만 기타부터 살 생각을 하고, 연주도 못 하면서 하루 종일 기타 생각뿐이다. 유튜브는 나에게 기타 관련 쇼츠만 계속 권한다. 그렇게 마흔둘에 시작된 나의 기타 도전. 말 그대로 숭고한 결심이다. 그 뒤로는 기타 없이 못 살고, 하루에도 몇 번씩 기타를 만진다. 기타 없는 날엔 손이 허전하다.


물론, 내 인생에 대단한 변화가 생긴 건 아니다.

여전히 똑같다.


코드는 외웠지만 막상 바꿀 때면 손가락이 덜덜 떨리고,

버벅대다 박자를 놓치고,

제멋대로 치다 보면 그야말로 작곡이 된다.

기타 가방을 메고 걸을 땐 어깨가 으쓱해지지만,

막상 기타를 꺼내면 쪼그라든다.

꾀꼬리 같은 미성은커녕 묵직한 중저음만 집 안 가득 울려 퍼진다.


그런데도 좋은 변화가 분명히 있다. "나중에 알아보자."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그 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언젠가 하겠다며 미뤘던 것들을 일단 해보려는 마음이 생겼다.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아빠, 계속 기타 치는 거야? 안 지겨워?"
"재밌는 건 안 지겨운 거야. 나중에 아빠가 백 살 돼서 죽으면 기타도 같이 묻어줘."

"아빠는 이백 살까지 살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그 실없는 대화에 거실에 앉은 가족 모두가 웃었다. 처음엔 외워야 할 코드가 너무 많아 좌절하기도 했고, 유독 박자 감각이 없는 내 자신을 탓하며 어릴 적 피아노라도 제대로 배워둘 걸 하는 후회까지 밀려왔다. 악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은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연습을 할수록 자신감이 생기긴커녕 '내가 이걸 왜 시작했을까' 싶은 날도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분명히 힘든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젠 홍대역 9번 출구에서 버스킹을 꿈꾼다. 물론, 지금으로선 말 그대로 꿈이다. 하지만 그 꿈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 백발이 될 때까지 꾸준히 연습하면 동묘시장 어귀에서는 기회가 생기지 않겠나.


맞다. 이쯤 되면 진심이다. 어릴 적, 강제로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서 몇 년간 울며 바이엘만 마스터했던 내가, 이젠 스스로 음악을 찾아 나서고 있다. 웃을 일이 많아졌고, 자신 있게 중저음으로 소리를 지르니 스트레스도 날아간다. 인상이 펴지고 인물도 훤해진다(물론 내 생각이다). 게다가 무겁고 단단한 기타 가방 덕에 어깨마저 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요즘 거울 속 내 모습은, 이상하게 때깔이 곱다.


기타 치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더니, 이제야 그 말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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