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조금 덜 쪼잔해진 날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회사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죽어나가는 것처럼 비극적인 결말은 아니고, 희망찬 꿈을 안고 홀연히 사라지는 식이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 일 없을 것처럼 인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단다. 속으로는 분명 사요나라를 외쳤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여름휴가 때도 일이 몰려 출근을 해야 했는데, 연말이 되니 드디어 숨통이 트였나 보다. 3주를 몰아서 쉰다길래 어디를 가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이 시간을 위해 여름휴가도 아껴둔 거라고 했다.
나는 겉으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지독한 분이네' 하고 생각했다. 비아냥보다는,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말이다.
나는 월차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차로 나눠 쉬는 걸 좋아한다. 만약 반의 반차라는 개념이 생긴다면, 나는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부를지도 모른다. 땡땡이치듯 힘차게 빠져나오는 그 기분이 좋다.
사람들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면, 남아 있는 우리도 슬슬 풀어진다. 일하러 나온 건 맞는데, 꼭 일을 해야 할 것 같지는 않은 어딘가 선진국 같은 분위기가 회사 전체를 잠식한다.
처음엔 다들 열심히 하려다가도, 어느새 커피 타임이 길어지고 대화가 늘어난다. 회사는 점점 더 근속하기 좋은 공간이 된다.
이 느슨한 분위기의 중심에는 서울 자가에 우리 회사 다니고 계시는 부장님이 있다.
회의 시작 전, 부장님은 늘 농담으로 분위기를 푼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말이 나왔다.
"자, 커피 한 잔씩 하면서 시작할까요? 피터의 펜님께서 한 번 하세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 번 하라니' 무슨 뜻인지 순간 사고가 멈췄다.
자기가 돈 주겠다는 건가?
그냥 심부름 한 번 하라는 건가?
사실 심부름이라면 내가 또 전문이다.
지금이야 영포티지만, 나도 한때는 막내 생활 전문이었고 총무 역할도 많이 했다. 이럴 때는 눈치 안 보고 달달한 카페모카에 휘핑크림 올린 벤티 사이즈를 시킬 수 있는 특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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