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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May 27. 2020

미숙, 남우 그들이 바라보는 시간은

 <올해의 미숙>, <삼점몇키로>



 한 작품을 무엇으로 규정하는 건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작품의 풍부한 세부는 하나의 요소로 묶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일반화를 기꺼이 감수하곤 하는데, 이 단정적인 진술은 작품의 어느 지점을 선명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격적 논의에 앞서 정원 작가의 작품을 규정하는 건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정원 작가의 작품은 무엇일까? 첫 장편 <올해의 미숙>의 표지를 보자. 그 표지는 에필로그의 한 장면을 옮겨왔다. 공간이 확장된 만큼 고요한 한기가 깊어지고 무엇보다 주인공 미숙이의 눈이 선명히 솟아오른다. 그렇다. 정원 작가의 작품은 눈에 관한 만화다. 이번엔 단편집 <삼점몇키로>의 표지를 보자. 세 친구는 나란히 서 있다. 하지만 유독 미숙이와 눈매가 닮은 남우만이 앞표지를 차지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뒤표지로 밀려나 있다. 미숙이와 남우. 두 사람은 같은 눈을 갖고 있다. 눈동자는 완전히 채워지지 못한 채 헝클어져 있다. 그리고 이마저도 일부는 눈언저리에 가려져 버린다. 눈동자엔 어느 정도의 막막함이 묻어있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가질 그런 감정 말이다. 정원 작가의 주인공들은 불안하고 때론 위태롭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한편으로 단단한 눈을 가졌다. 양립하기 힘든 일련의 감정들이 두 눈 안에 공존한다. 이야기는 바로 그 눈동자에서 시작된다.     


정원 작가의 작품은 눈이다

 정원 작가의 세계를 이끄는 것은 눈이다. 그것은 주인공이 쉽사리 잊지 못할 눈을 가져서만은 아니다. 그 눈은 주인공의 내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단절한다. 그래서 일까. 정원 작가의 작품에선 뒷모습이 유달리 눈에 밟힌다. 미숙이가 기억하는 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등지고 누운 뒷모습과 책상에서 담배연기를 흘리는 뒷모습이다. 그 뒷모습은 주인공 눈동자처럼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면 보여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뒷모습이 이중적인 이미지인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뉴 서울 Lo-Fi>의 버스 안 풍경, 남우와 재근의 뒷모습에선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의 뒷모습은 곤혹스러울 어떤 순간 그 형태를 기어코 드러내고 만다. 생사를 확인할 수 없지만 어쨌든 반려견이 묻힐 자리를 파내야 할 때, 마지막이 될 것을 알면서도 심지어 서로에게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친구집 대문을 두드릴 때처럼 말이다.


  다시 한 번 눈으로 돌아가 보자. 눈의 움직임은 신체의 가장 미세한 움직임 중 하나다. 눈을 그린다는 건 달리 말해 순간을 놓치지 않는 섬세한 눈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눈은 더 이상 주인공만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눈의 주제론 체계는 자연스레 작가의 눈 그러니까 작가의 시선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원 작가는 어떠한 시선으로 세상을 그려낼까. 작가는 주인공의 삶에 적극적으로 끼어드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들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자꾸만 머뭇거린다. 주인공의 내면과 감정을 직접 보여줘야 할 때 가끔은 뒷모습으로 그것을 대신하곤 한다. 이런 점에서 관조적 시선 즉 정적인 롱테이크를 연상시키는 연출은 정원 작가 작품에서 필연적 귀결처럼 보인다.  만화에서 롱테이크를 연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칸을 확장시켜 공간에 시간을 담는다. 즉 칸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 시간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나의 그림은 사진과 달리 오직 하나의 순간만을 재현하진 않는다. 둘째, 특정 순간을 잘게 쪼개어 연속으로 이어붙이는 방법이다. 이 연출은 앞선 사례와 비교하면 만화적이기 보다 영화적인데, 차이보다는 연속의 개념으로 물리적, 심리적 시간을 지속시킨다.


  이 때 정원 작가가 채택한 롱테이크 연출은 바로 후자다. 미숙이가 누나를 따라 좁은 연석을 걷는 뒷모습을 따라가 보자. 그 장면은 후반부 남자친구와 정면으로 걷는 모습과 대비되며 서사의 정합성을 획득한다. 실은 그건 중요치 않다. 진정 의미를 갖는 건 유사한 외양의 이미지들이 묶여 지속의 시간으로 흘러간다는 사실이다. 이 때 어느 이미지도 다른 이미지에 대해 우월함을 내세울 수 없다. 우월함을 주장하기엔 각각의 이미지는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중복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 순간 우릴 한 숨 짓게 한다. 어떤 말도 건넬 수 없고 단지 그 순간을 지켜 볼 수밖에 없다. 일렁이는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차곡차곡 펼쳐내는 이미지와 그것이 만들어낸 시간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90년대-2000년대의 시간성

 <올해의 미숙>과 <삼점몇키로>에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친 특정 시기가 반복 된다. 워크맨, 모기향, 모래 놀이터, 마당 딸린 주택과 같은 시대적 기표는 클로즈업된 사물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거나 아니면 거리의 풍경으로 한 발쯤 물러서 있다. 여기서 90년대 전후의 시간성은 중요하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최근 대중문화의 흐름과 연계되기도 하지만 특히 인접한 과거라는 독특한 시간성은 정원 작가 작품의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선 서사적 차원에서 90년대 기표는 시대를 재현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넘어 인물을 형성하고 이야기를 생산한다. 가령 문예지와 무소유라는 책, 마당에 방치된 개, 실내에서 내뿜는 담배 연기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미숙이 아버지의 비루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을까. 또한 슈퍼마켓 앞의 평상, 대여점에서 빌린 비디오, 휴대폰을 접했을 때의 첫 경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미숙이와 재이의 씁쓸한 우정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각각의 기표는 이야기를 위해 배치되었다기보다 차라리 그것의 관계를 통해 고유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편이 보다 적절하다.


 어느새 2000년대는 현재와의 간극이 20여년이나 벌어지며 본격적인 회고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회고의 대상인 7,80년대와는 다른데, 왜냐하면 00년대의 어느 지점은 여전히 동시대의 연속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과 그리고 머지않아 시간 속으로 사라질 거라는 예감이다. <뉴 서울 Lo-Fi>에 등장한 워크맨을 보자. 워크맨은 2000년대 초반인 작품 내에서도 이미 시대착오적이다. 어머니가 재우에게 “그걸로 지금 할 수 있는 게 있어? 들을 수 있는 노래는 있고?”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에서 조금 떨어진 90~00년대를 현재화하듯, 주인공 재우 역시 그 시대에서 조금 떨어진 과거를 아직 놓아주지 않는다. 이렇게 <뉴 서울 Lo-Fi>은 과거로도 현재로도 선뜻 말하기 어려운 어떤 시간대에 머무른다. 그러고는 구시대적 유물 워크맨은 90년대 후반 영화 <춘광사설>과 공명한다. “나 이거 알아, 춘광사설에 나온 것 맞지.” 90년대를 지난 2000년대의 언저리, 그 시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무늬가 있는 것이다. 버스 안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면, 그건 아마도 음악을 듣기 위해서 ‘딸깍’ 거리는 버튼을 눌러 ‘위이잉’하며 테이프를 되감아야만 하는 텅 빈 시간 때문일지 모른다.   

   

 지속되는 과거와 멀어지는 과거, 이러한 주제론적 체계를 다시 한 번 확장시켜 보자. <올해의 미숙>은 00년대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그 시간성 자체를 표상화한 작품으로 읽어낼 수 있다. <올해의 미숙>은 1부, 2부에 미숙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90년대를, 프롤로그와 마지막 장에는 중고등학교 이후의 2000년대를 배치한다. 현재에서 과거 다시 현재로 돌아가는 서사 구조이지만, 작품을 읽는 이는 알 수 있듯 그 과거는 현재와 명확하게 단절된 시간 즉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중고등학교의 과거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며, 미숙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로 얽혀 있는 과거가 밀려나지 않은 채 자꾸만 미숙이의 현재에 머무른다. 이러한 이유로 <올해의 미숙>은 2000년대를 노스탤지어로 채색한 다른 작품과 달리, 어떤 과거는 힘겨울지라도 떠나보내야 하며 그것은 달리말해 성장이라고 담담히 말을 건넨다. 그러니 “그 동안의 일들이 먼 미래처럼 느껴진다”라는 대사와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미숙이의 뒷모습이 나란히 장면에 배치될 때, 이 마지막 장면은 <오늘의 미숙>의 더할 나위 없는 결말처럼 보인다. 미숙이는 더 이상 과거의 미숙이가 아니다. 현재의 미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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