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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Jun 25. 2020

<자본주의 히어로 Z>


 <자본주의 히어로 Z>는 이상하다. 최준혁 작가는 이에 자신을 비현실적인 것을 다루는 작가로 소개한다. 가슴을 보여주고 돈을 버는 히어로에서부터 달 크기의 햄스터가 쳇바퀴를 타고 지구와 충돌하는 인류멸망까지. 이러한 세계를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차라리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이 이상한 세계가 어딘가 익숙치 않은가. <자본주의 히어로 Z>는 예전 병맛만화를 떠올리게 한다. 자조적 정서, 개연성의 일탈 그리고 때로는 무너진 작화까지, 병맛 만화의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 히어로 Z>는 병맛 만화가 아니다. 병맛 만화는 그 자체로 장르라기보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문화와 결합한 부조리 만화의 한 변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병맛 만화를 언급한 건 무의미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유행이 지나버린 만화를 굳이 언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병맛 만화가 과거 특정시대를 반영했다고 가정한다면, 최준혁의 만화 역시 동시대의 어떤 징후를 암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설사 두 작품 모두 일상을 전복시키며 비현실로 나아갈지라도, 그 비현실을 이끄는 동인과 그것이 펼쳐내는 세계까지 동일할 순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문제 의식이 바로 <자본주의 히어로 Z>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그럼 본격적으로 최준혁의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보자.     


장르/벤데이 도트의 패턴

 병맛 만화를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 <자본주의 히어로 Z>의 보다 본질적인 속성은 다름 아닌 장르 만화다. 최준혁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장르만화를 기반으로 구축돼 있다. <자본주의 히어로>에서는 <사이보그 009>코스튬으로 온 몸을 완벽히 감싸지만 한편으로 <블랙위도우>처럼 지퍼를 살짝 내린 히어로를, <골렘 연상학과>에서는 <해리포터>의 마법학교를 다니면서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마법진을 연성하는 마법사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이 있다. 최준혁 작가는 장르 만화를 도입하되 결코 지속해 밀고는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자본주의 히어로>에서는 히어로 능력을 생략한 채 오직 노출된 가슴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우리는 이러한 의도적 부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약 장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작품의 주제를 유지한 채 장르적 요소만 제거해보자. <자본주의 히어로>의 경우 부업을 하는 청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떻게 전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야기 자체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평범한 이야기가 장르적 상상력과 결합 될 때 상황은 달라진다. 벌어진 가슴에서 비현실적인 서사가 발생하고 급기야 폭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히어로의 실존과 직면할 때 작품의 주제는 보다 깊어진다. 하나의 일로는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삶을 보여주고 “애초에 가난한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묻는 질문에서는 <자본주의 히어로>에서 ‘자본주의’를 환기시킨다. 또한 미소만 짓고 아무것도 사례하지 않는 시민과 무표정하지만 돈으로 사례하는 시민의 대비를 통해 창작자에 대한 메타적 시선으로까지 확장한다. 작가가 장르 만화를 도입한다는 건, 비현실 속에 있는 일상을 주제로 작업을 한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좌)자본주의 히어로 Z  (우)미술가의 작업실, 이것 좀 봐 미키

 
 이렇게 장르는 서사의 패턴을 창출한다. 그리고 이어 최준혁 특유의 망점은 다시금 서사의 패턴을 증폭시킨다. 최준혁 작가는 인터뷰에서 출판 만화를 선호한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매체나 페이지 연출에 대한 선호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최준혁 작가의 형식 미학은 흑백 출판만화의 표현 양식 중 하나인 ‘스크린톤’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사실 흑백 출판 만화에서 스크린톤은 일반화된 표현이다. 그럼에도 이 미세한 점의 집합들을 주목하는 것은 최준혁 작품에서 망점은 단순히 음영효과나 감정표현으로만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히어로 Z>의 표지를 보자. 주인공의 당황한 표정과 극적인 움직임에 앞서, 공간 일부를 선점한 점과 선이 우리의 시각을 강렬히 자극한다.


 이러한 패턴화된 표면은 자연스레 ‘로이 릭텐스타인’의 팝아트를 연상시킨다. 그는 인쇄기법 중 하나인 ‘벤데이 도트’를 차용해 자신만의 고유한 기법으로 발전시킨 작가다1). 여기서 벤데이 도트는 음영을 단계적으로 조절해 인쇄 이미지를 점들의 체계로 만드는 기술로서2), 스크린톤과 유사한 외양을 공유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히어로 Z>의 인물과 배경이 추상적 구성으로 기울어질 때, 그 장면이 릭텐스타인의 <미술가의 작업실>과 공명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즉 최준혁 작가의 작품에서 망점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구두점이 된다. 그림과 대사만으로는 담아내지 못한 비현실적 사건의 과잉은 무수한 점으로 대체된다. 게다가 정제된 선으로 구획된 공간에 점과 사선으로 빈틈없이 채워질 때, 3차원 환영은 2차원 평면의 패턴으로 환원되고 종국에 이 추상적 무늬는 어떤 정념들과 결합하여 작품의 독특한 표정을 만든다.       



소년만화의 안티테제

 다시 장르 이야기로 돌아가자. 최준혁 작가의 작품은 SF, 히어로, 판타지 등 여러 장르들을 넘나든다. 그러면 이 모든 장르들을 하나의 최상위 장르로 규정할 수 있을까. 엄밀하진 않지만 최준혁 작가의 작품에 한정한다면 그것은 노력, 우정, 승리로 대표되는 소년만화다. 소년만화가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특히 <자본주의 히어로 Z>의 경우 이를 통해 소년 만화에 대한 강력한 안티체제를 구축한다. <나루토>의 유명한 밈, 최고의 호카게가 되겠다는 나루토를 보고 “우린 안될 거야, 아마”라고 자조하는 것처럼, 반성장의 서사는 <자본주의 히어로 Z>의 강력한 동인으로 작동한다.

 <골렘 연성 학과>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성장은 애초에 가능하 것이 아니라고. 대학은 언제 망할지 모르며 설사 망하지 않더라도 학생들에게 어떠한 미래도 약속하지 않는다. 학생들 역시 무력하데 그들은 오직 현실 도피라는 유희에만 골몰해 있다. 이러한 반성장의 우화는 다른 작품 <망함 갱생 프로젝트>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최준혁 작가는 SF적 도입으로 인간의 망함을 전 우주적으로 확장시킨 후 시간여행을 통해 구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원래부터 망한 인생이기에, 망함에서 벗어나려 고통 받지 말라”는 반성장의 교리를 설파한다.


 이 지점에서 병맛 만화를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병맛 만화와 최준혁 작품 모두는 냉소, 유예, 도피라는 수동적 정념을 공유한다. 하지만 두 작품엔 시대의 격차에서 야기한 결정적 간극이 존재한다. <이말년 시리즈>의 ‘불타는 에피소드’를 보자. 담배꽁초를 버린 실수가 삽시간에 증폭되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라고 말하며 자기파멸로 뛰어든다. 기승전병 즉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가다 마지막 와장창 무너뜨리는 유희를 즐기는 것이다. 선우훈 작가가 지적했듯 병맛 만화는 디시 인사이드라는 대형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기성세대의 질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분야에서 새 질서의 창시자가 되는 기쁨을 동력으로 삼았다.

 하지만 최준혁 작가의 세계는 어떠한가. 대형 커뮤니티에서 SNS로의 이동 때문인지 아니면 생각 보다 훨씬 더 무너져버린 현실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제<자본주의 히어로 Z>는 병맛 만화의 전복조차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소진할 힘도 없이 하얗게 불태워버린 걸까. 최준혁의 이 부조리는 서사가 시작되기 전 이미 현실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현실에서 많은 이들 특히 청년 세대는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차단당하고 설사 이행하더라도 유사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파편화 된다. <인류 멸망 시놉시스>에서 보여주듯 모든 노력은 무화되는 것이다. 최준혁 작품의 인물들을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성장하려 노력할수록 삶은 더 비참해지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시대적 징후를 정치경제학으로 확장시키면  ‘햇빛 안 드는 공장’ 보다는 ‘이 일당에 숙식 제공까지 하는 공장은 이것 밖에 없는’의 생산양식에 보다 가까워진다(<공장에서 마늘과 쑥을>). 그렇게 <자본주의 히어로 Z>는 벤데이 도트로 장식된 나른한 카프카적 세계가 된다. 이 세계는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성(城)이라는 부조리한 전언을 남기면서.     


비현실이 현실이 될 때

 최준혁 작가는 성장이 불가능한 삶을 통해 세계의 현실성을 확보한다. 이 세계에선 미래를  기획할 수 없으며 더 나은 삶 또한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분명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성장이 불가능한 삶을 재현한다고 해서 성장을 이렇게까지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 우선은 서사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최준혁 유니버스는 계속해 팽창하는데, 이 지속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서사와 인물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성장에 대한 강요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히어로 Z>의 인물들은 기존의 세계에 너무나도 쉽게 흡수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많은 경우 현실과 아무런 긴장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공포의 횟집 아들이 온다>의 주인공이 엄연히 지속되는 폭력을 외면하고 ‘꼬시다’라는 말로 퉁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성장이 가능한 조건이 아닌 상황에서 성장을 하라는 건 과도한 요구일 수 있다. 다만 작가의 방식대로 그러니까 비현실적 돌파로 모두는 아닐지라도 현실 일부를 파열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이야 말로>와 <행운의 컵 도용 사건>로 이어지는 인류멸망팀 연작은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금이야 말로>는 음악 만화 <BECK>을 경유하여 장기자랑 밴드공연을 경쾌하게 풀어간다. 특히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토리’가 손 드는 장면은 소년만화의 감정적 모멘트와 결정적 장면을 담아내 짜릿하다. 이후에도 밴드 공연은 의외로 잘 마무리 되고 이 과정에서 팀원 모두는 결과에 만족한다. 정의내릴 수 없지만 무언가 성장을 이뤄 낸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성장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작가는 머뭇거리다 이전처럼 다시 성장을 유예한다. 토리는 다음 공연에 대한 기대에 “다음은 없어요”라고 정리하고 이에 사람들은 “흠 그랬구나.. 내일 출근 준비나 하자”로 허무하게 끝난다.

 그래도 미묘하게 비튼 이 (반)성장 서사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 이전과 다르게 성장이면서 성장이 아닌, 성장이 아니면서 성장인 무언가가 울림을 준다. 이러한 변증법적 (반)성장은 <행운의 컵 도용 사건>에서도 계속해 이어진다. 이 작품에선 전작에서 유일하게 성장을 보여주지 못한 ‘더그’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컵을 도용한 사람을 찾기 위해 소년탐정 김전일이 된다. 추리를 통해 사건을 과잉시키다 결말에서 뜻하지 않게 승진을 한다. 비록 야근으로 건강을 잃는 최준혁식 각주로 마무리되긴 하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겐 이 성장이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게 뭐가 대수인가. 전작에 Z를 덧붙인 <자본주의 히어로 Z>는 마징가 Z처럼 출동 준비를 완료했는데. 그리고 누구도 아닌 최준혁 작가 자신이 “나는 천재다. 능히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데.





1) 김보영,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확장된 회화의 특성

2) 할 포스터, 1900년 이후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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