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혁진 Jul 29. 2020

<체르노빌의 봄>

 

 얼마 전 미드 <체르노빌>을 봤다. <체르노빌>은 1986년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재구성한 드라마다. 일종의 재난 서사로서 재난이 발생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후 재난을 극복하면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모두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책임자들을 처벌한다. 여기서 <체르노빌>은 작품성과 별개로 재난서사로서의 근본적 결함을 안고 있다. 재난서사는 재난 이후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이 비판은 다소 부당해 보일 수 있다. 재난이 해결되면 그 동안 직면한 주요 갈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 다음과 같이 되묻겠다. 재난이 해결됐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은 특히 체르노빌 사고에서 중요한데, 모두들 알다시피 원자력 재해는 인간 수명의 비추어 사실상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즉 체로노빌 원전 사고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재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일담이라 할 수 있는 <체르노빌의 봄>을 <체르노빌>에 이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체르노빌의 봄>은 현실참여를 지향하는 예술단체 ‘데생악퇴르’가 사고 20년 후 체르노빌을 방문하는 이야기다. 당연히 <체르노빌>과 <체르노빌의 봄>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두 작품이 다루는 시대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서사와 르포르타주라는 글 쓰는 방식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광학적으로 투영된 이미지와 물질적 질료로 층을 쌓은 이미지라는 매체의 차이가 각 작품의 고유성을 구성한다.     


 심리적으로 그려진 풍경화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와 데생악퇴르 동료들은 체르노빌에 머물며 그 곳의 풍경과 사람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때의 작업을 정리한 <체르노빌의 봄>은 일종의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엄청난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점은 르파주가 체르노빌에서 그린 그림들은 그 자체로 만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드로잉이 되었든 채색화가 되었든 그것은 차라리 독립적인 회화에 가깝다. 다만 이후 이 그림들은 <체르노빌의 봄>의 구심점이 되어 연속된 만화의 일부분으로 수렴된다. 요컨대 <체르노빌의 봄>은 만화 안에 그림 이미지가 삽입된 즉 만화 안의 만화 형식을 취한다.


 만화 이미지와 그림 이미지가 충돌하면 어떤 의미가 발생할까. 짐작하기 힘들다면, 우회하여 그림 이미지 대신 사진 이미지를 충돌시켜 보자. 우선 사진 이미지는 대상의 흔적으로서  진실성을 보증한다. 그리고 만화 이미지와 사진 이미지의 존재론적 격차는 홈통에서 격렬한 충돌을 발생시킨다. 심지어 동일한 층위의 사진 이미지를 배열할 때조차도 대립은 지속되는데, 왜냐하면 연속 배열로 지속을 만드는 이 행위는 특정 순간을 때어내는 사진의 불연속적 존재를 배반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그림 이미지로 돌아와 사진 이미지와 비교해보자. 사진 이미지가 외양을 인용한다면 그림 이미지는 외양을 번역한다. 또한 사진 이미지가 여기에 그것이 있었다라고 증언하는 반면 그림 이미지는 나는 여기서 이렇게 감각했다고 진술한다. 즉 사진 이미지는 존재론적이고 그림 이미지는 인식론적이다.


 <체르노빌의 봄>에서 그림 이미지의 색채가 급격히 변화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반부 흑백의 페허적 공간은 후반부로 흐를수록 천연색의 환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물론 전반부와 후반부의 체르노빌 공간이 변화했을 리는 없다. 만약 체르노빌을 사진으로 찍는다면, 각각의 사진에 기록된 외양은 서로에 대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그림은 카메라 렌즈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묘사한다. 부분적으로는 사진처럼 기하학적으로 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리적으로 본다. 그래서 엠마뉘엘 르파주가 처음 체르노빌을 그릴 때 검은 입자를 흩뿌리는 목탄을 선택한 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는 체르노빌에 도착했을 때 이곳을 비극의 현장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가령 쇠락한 동유럽 도시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금지구역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후 작가는 기존의 알고 있던 체르노빌과는 다른 체르노빌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기존의 선입관과 달리 인간과 자연은 경이롭게 생명력을 뿜어낸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푸른 숲과 대면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두운 초록부터 환한 연두까지 다채롭게 빛나는 무성한 잎사귀, 아름다운 노란빛의 부드러운 새싹, 선홍빛으로 뻗은 침엽수, 쪽빛 자작나무 그리고 휘날리는 햐얀 꽃잎. 이 모든 색의 향연이 타오르는 듯 강렬히 보인다”라고. 이렇게 있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에 고양된 그는 전에는 볼 수 없던 눈부신 색채로 화첩을 채워가기 시작한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반성적 작업

 <체르노빌의 봄>의 서사는 분리될 수 없을 만큼 결합돼 있지만 두 개의 층위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체르노빌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위의 과정들을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즉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논의를 전개할 주제는 후자인 그림 그리기에 대한 반성적 작업이다. <체르노빌의 봄>에서는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또한 그려진 그림의 일부를 빈번하게 보여준다. 이 일련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다음 칸에서 전체 모습을 완연히 드러낼 때 그것은 놀랍다. 반짝이는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원색의 색채는 물론 매혹적이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나를 사로잡는 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 <체르노빌의 봄>의 세계에서 이 풍경은 그림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작가가 그린 그림이 보이고 다음으로 그 그림이 제시됐을 때 그것은 그림일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 그림이 놓인 공간이 칸의 흐름상 세계의 풍경을 재현할 공간이라면. 유감스럽게도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것이 옳은지 확신할 순 없다. 이 모호한 풍경은 세계의 모사일 수도 아니면 세계의 현실일  수도 있다. 그 결과 <체르노빌의 봄>은 때때로 우리를 초현실적 세계로 인도한다. 그림과 현실의 경계는 불분명해지며 더욱이 칸의 의미체계마저 흐려질 경우 페이지는 무수한 칸으로 구성된 색채의 패턴으로 분해된다.      



  엠마뉘엘 르파주가 펼쳐내는 풍경은 분명 아름답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곤혹스러움도 함께 야기한다. 이 감정은 풍경이 종국에 자연주의에서 벗어나 색과 형상의 추상화로 이탈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재현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진실의 문제에 가깝다. 사실 이 세계의 실재는 틱틱거리는 방사능 측정기가 울리는 죽음의 공간이다. 눈부시게 빛나는 풍경이란 일련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체르노빌의 봄>은 르포만화가 전해야 할 진실을 외면한 게 아닐까. 더구나 이 문제는 작가도 인지하듯 고통의 윤리학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는 <체르노빌의 봄>을 작업하며 “섬세하게 호흡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색상들은 끔직한 현실을 덮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끔 했다”라고 고민한다. 앞서 <체르노빌의 봄>의 세계를 초현실적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용어는 수잔 손탁이 지적했듯 아름다움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관념이 똬리를 틀고 있는 병적인 완곡어법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과연 체르노빌의 속성이 될 수 있을까. 르포르타주같은 작품에서 아름다움은 때론 진실의 지위를 손상시킨다. 하지만 체르노빌의 아름다운 풍경은 분명 또 다른 현실이 아닐까. 주체에게 감각적으로 나타나는 이 현상도 결국 육체를 지닌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그릴 수밖에 없고 그리고 그것은 모두는 아닐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어떤 진실을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고통은 아름다움을 기꺼이 용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린 고통을 재현할 때 아름다움은 무엇을 위한 아름다운인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체르노빌의 봄>의 아름다움에 대해 답할 차례다. <체르노빌의 봄>은 아름답다. 만화와 그림, 무채색과 유채색, 고통과 희망을 교차하며 체르노빌을 오직 비극만으로 환원하지 않는 그 풍경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이 고통에 대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장자크 상페의 드로잉, 풍경, 신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