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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Apr 20. 2021

로돌프 퇴퍼: 낭만주의의 명령, 만화를 융합하라

19세기 스위스 태생의 로돌프 퇴퍼(Rodolphe Töpffer)(1799~1846)는 최초의 만화가 또는 현대 만화의 아버지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cCloud)는 카툰화법과 칸 경계선을 도입하고 글과 그림을 결합한 선구적인 작가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퇴퍼가 만화적 요소를 새롭게 발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화의 기원은 이보다 더 먼 과거로 소급될 수 있으며, 비록 만화로 불리지 않았을지라도 만화적 특성을 선취한 사례는 풍부하다그렇다면 만화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퇴퍼는 만화 그 자체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만화를 독자적 예술 형식으로 인식한 작가였다. 그는 글과 그림의 조합에 관하여 이같이 언급한다. “이 책의 성질은 혼합된 자연스러움이다. 각각의 그림은 1~2줄의 텍스트를 동반하고 있다. 그림은 텍스트 없이는 불투명한 의미들을 가질 뿐이며 또한 그림 없는 텍스트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모든 조화가 소설을 닮지 않은 독특한 소설을 형성한다.” 게다가 연속 언어의 관점에 있어서도 연속 이미지를 통한 의미 생성을 누구보다 탁월하게 제시하는데 가령 무명의 작가였던 퇴퍼를 유럽에 소개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퇴퍼의 작품이 정신 내에서 얼리고 풀리기(freezes and unfreezes)를 반복한다고 극찬한다.


 그런데 만화의 역사를 논의하는데 있어 이 같은 괴테의 등장이 갑작스러운가. 퇴퍼에게 괴테와의 인연은 기대치 않은 행운이기는 했다. 하지만 퇴퍼의 작품을 칭찬한 이가 다름 아닌 괴테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종합으로 질풍노도 이후의 전독일 문화를 하나로 묶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로돌프 퇴퍼와 만화 그리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낭만주의. 나는 이 지점에서 만화와 낭만주의 사이에 어떤 관계를 가정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 만화를 낭만주의의 범주 안에 놓는 것은 무리한 시도일지 모른다. 그러면 추가적으로 퇴퍼의 책에 서문을 남긴 프리드리히 피셔(Friedrich Vischer)를 함께 언급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는 추를 미학적으로 고찰한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아 그로테스크에 깊은 관심을 가진 미학자다. 논의를 이렇게 끌고 오긴 했지만 로돌프 퇴퍼를 정말로 낭만주의자로 규정하려는 건 아니다. 사실 그는 공식적으로 낭만주의자라 밝힌 바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업이 여전히 매혹적인 것은, 이전까지 흩어져 있던 만화적 요소들이 낭만주의의 명령으로 어떻게 하나의 새로운 언어로 융합되었는지를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캐리커처로 세계를 그리다

 먼저 로돌프 퇴퍼 작품의 외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인물들은 뾰족한 코, 튀어나온 턱, 기이하게 뒤틀린 몸통을 가졌으며 여기에 더해 칸과 배경과 글자는 어지러이 얽혀 있다.   즉 퇴퍼의 세계는 그로테스크하다. 이것은 단순한 인상 비평이 아니다. 로돌프 퇴퍼는 아직 만화라 불리지 않을 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캐리커처라는 방법론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캐리커처는 추하고 왜곡된 것들을 묘사하고 불균형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특히 추의 미학이 확산된 퇴퍼의 시대에는 자연을 이상적으로 모방하는 원칙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점에서 로돌프 퇴퍼가 동식물이 얽힌 그로테스크한 폼페이 벽화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니 추에 대한 동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했다 말하는 것이 옳을 텐데, 예를 들어 그가 즐겨 읽은 <An Historical Sketch of the Art of Caricaturing>(1813)에는 풍자화, 캐리커처, 중세 필사본, 태평양 섬의 토템 같은 이후 만화의 어휘로 태동할 크로테스크한 이미지가 가득하다.  

 그렇다면 로돌프 퇴퍼는 왜 이토록 캐리커처에 매혹되었던 것일까. 그 까닭은 캐리커처 달리 말해 낙서처럼 휘갈긴 구불구불한 선은 아카데미 회화를 비판하는 퇴퍼에게 있어 좋은 대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면적 지성에 영혼과 생명의 힘을 일깨우려는 낭만주의자처럼 아카데미 교육 제도를 격렬히 반대한다. 아카데미 회화는 무한히 풍요로운 생명과 자연을 측정하고 제단 하는 작업이며 그러하기에 예술가의 천재적 영감은 필연적으로 억압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캐리커처로 정확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선은 로돌프 퇴퍼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영국의 풍자만화가 조지 크루이크섕크(George Cruikshank)부터 이야기해보자. 캐리커처에 매혹되었던 시인 보들레르(Baudelaire)는 그를 이와 같이 논평 한다. “크룩생크를 책망할 수 있는 유일한 잘못은 ... 항상 양심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낙서를 하며 즐거워하는 인처럼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은 생명체는 항상 뚜렷한 형태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은 소우주는 형언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그리고 자연의 재현에 대한 걱정 없이 구르고 펄럭이고, 뒤섞인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로돌프 퇴퍼가 추구했던 캐리커처의 미학이다. 다만 퇴퍼의 캐리커처를 논의할 때는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다. 로돌프 퇴퍼의 <Essai de physiognomonie>(1845)를 보자. 이 에세이에는 눈, 코, 입을 각각의 기호로 인식하여 조합하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분방한 드로잉을 선호하는 퇴퍼가 아카데미 양식을 연상시키는 기호화를 추구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로돌프 퇴퍼도 자신의 모순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해야 했다. 기호화는 어떤 면에서 캐리커처의 정신 즉 자연의 모방으로부터 자유를 촉진시키며 게다가 이 단순한 형태가, 곰브리치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축복된 존재의 법칙을 획득하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돌프 퇴퍼는 윌리엄 호가스 작업을 보다 정교화 하여 자신만의 기호학적 체계를 구성해 나간다. 그는 당나귀 캐리커처를 보여주며 그것이 실제와 닮지 않았지만 즉각적으로 당나귀에 대한 관념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점과 선으로 구성된 인물을 제시하며 선과 형태가 억제됐음에도 이 인물은 생기로 충만하며 본질적 의미와 더욱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놀라우리만큼 현대적이며 무엇보다 스콧 맥클라우드의 ‘카툰화’개념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낭만주의자 로돌프 퇴퍼는 이렇게 캐리커처와 기호화를 종합하여 새로이 시적인 만화 언어를 창조한다.



그림: Essai de physiognomonie>(1845)


      

운동에 대한 낭만주의의 관심

 로돌프 퇴퍼의 만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적 칸을 도입한 연속언어(sequence language)이다그런데 현대적인 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퇴퍼에 앞서 독일의 비평가이자 극작가인 고트홀트 레싱(Gotthold Lessing)을 주목해보자. 레싱은 미학서 <Laokoon>(1766)에서 기호학적 관점 및 매체미학적 관점에서 문학과 미술의 본질을 규정한다. 미술과 문학이 사용하는 기호는 각기 ‘형상과 색채’ 그리고 ‘분절된 소리’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미술은 공간 속에서 물체를 동시적으로 병렬하는 것으로 문학은 시간 속에서 행위를 연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정의 한다. 요컨대 레싱은 미술과 문학 사이에 엄격한 범주를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 고려되지 않은 각 매체의 고유한 속성을 새로이 조명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후 낭만주의 극작가들의 의도된 오독이다. 레싱의 의도대도라면 시간적 연속 묘사를 추구해야 할 매체는 의당 문학일 것이다. 하지만 낭만주의 극작가들은 배우의 연기와 움직임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으로 회화가 그것을 하기를 원했다. 행위를 회화로 재현하기 즉 지속적 운동을 임의의 순간으로 분절한 후 그것을 다시 연속적으로 배열하는 일련의 작업. 분명 레싱이 원치 않을 방향일 테지만 그렇다고 낭만주의 극작가들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할 수만은 없다. <Laokoon>은 어떤 면에서 분명하게 시간 속에 진행되는 행위를  회화로 어떻게 옮길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요한 야코프 엥겔(Johann Jakob Engel)의 <Ideen zu einer Mimik>를 펼쳐보자. 팬터마임과 멜로드라마 연기를 상세히 설명한 이 책은 레싱의 가르침에 따라 배우의 각각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그림으로 옮겨놓는다.

 당연히 우리는 여기서 배우이자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인 로돌프 퇴퍼가 낭만주의가 번안한 <Laokoon>을 자신의 연속언어에 적용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로돌프 퇴퍼와 이전 시대의 윌리엄 호가스를 비교해보라.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은 사건, 암시 및 이차 플롯으로 중첩되어 있으며 더욱이 하나의 장면 안에는 다층적인 시공간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예를 들어 <A Harlot’s Progress>에서 전경에는 여주인공이 부유한 유대인 상인을 접대하는 모습을, 배경에는 그녀의 애인이 하인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는 순간을 동시에 재현한다. 그러나 퇴퍼의 그림은 이보다 부분적이며 또한 파편적이다. 호가스가 서사적 사건으로 칸을 구성했다면 퇴퍼는 그 서사적 사건 중 특정 행위를 발췌하여 칸으로 구성한다. 그렇다면 로돌프 퇴퍼의 세계에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칸 사이의 인과성은 긴밀해지고 연속된 이미지에는 동적인 운동이 발생하며 이에 따라 이 세계의 주인공들은 마침내 현대 만화의 무대에 어울릴법한 극적인 연기를 펼쳐낸다.



그림: Histoire de monsieur Jabot(1833)



인과성의 기계에서 악마적 장치로

 <Histoire de Mr. Vieux Bois>에서 주인공은 목에 매달린 막대기로 인해 자꾸만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다. 이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은 연속 언어와 연계된 로돌프 퇴퍼의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특히 퇴퍼의 슬랩스틱은 이후 일련의 계보를 형성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코믹 스트립에 한정되지 않으며 좁게는 <the sprinkler sprinkled>과 같은 초기 영화의 슬랩스틱을 넓게는 현대 영화의 액션 시퀀스까지 아우른다. 하지만 슬랩스틱의 기원이라는 역사적인 의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표면에 머무는 동적인 운동에 지나치게 몰두해서는 안 된다. 만화의 아버지와 함께 낭만주의 작가라는 독특한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적인 운동에서 수반되는 아이러니도 함께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다시 로돌프 퇴퍼의 연속 언어로 돌아가 보자.  연속 언어에 관한 퇴퍼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이 낭만주의의 모순을 체현하는 듯하다. 낭만주의는 평민층의 과도한 정열을 표현하여 상류층의 절제된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운동이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스스로가 계몽주의의 파괴적인 합리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기도 했다. 퇴퍼 역시 정확히 그러했다. 퇴퍼는 운동을 재현하는 연속 언어의 개념에 매혹됐지만 한편으로 반-아카데미주의자로서 그것을 온전히 지지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 회화는 공식적인 체계화된 언어이며 무엇보다 개성을 억압하는 도식화된 언어다. 당연히 연속언어는 아카데미 회화와 동일한 개념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퇴퍼의 관점에서 연속언어는 운동을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추상적 작업이며 그러하기에 그것은 합리성의 체계로서 아카데미 미술과 공통분모를 가진다.

 게다가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퇴퍼의 비판 대상이 연속언어와 아카데미 회화 즉 미학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근대성, 이성주의, 계몽주의, 자본주의를 아우르는 진보의 개념까지 비판한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보수적인 아카데미의 경우 보다 더. 퇴퍼는 진보의 반대자이자 한편으로 은밀한 옹호자였다. 그의 미학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은 양립 불가능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분열적이다. 낭만주의를 근대성과 반근대성,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에서 어딘가 위치한 복잡한 양면성을 가진 사조라 규정한다면, 로돌프 퇴퍼는 진실로 낭만주의자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지금까지의 선택 중 가장 매혹적인 선택을 한다. 근대성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아이러니하게 근대성을 내재한 연속 언어를 택한 것이다. 칸은 근대성의 은유로서, 칸-기계는 맹렬한 속도로 운동하며 그 안에 주인공은 무언가에 조정 받는 자동인형이 된다. 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인과성을 비판한 <Histoire de Monsieur Cryptogame>(1830)를 보자. 다리에 기둥을 매단 주인공이 겁에 질린 채 뛰어간다. 다음 장면에서는 기둥의 마찰열로 대화재가 발생하고 수백 마리의 동물들이 뛰쳐나온다. 그러고는 매 칸이 이동될 때마다 사건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간다. 심지어 이 세계를 바라보는 독자들 역시 예외일 수 없는데, 그들의 시선 또한 점점 더 강박적인 칸의 흐름 속에 빨려 들어간다.                                                                      




그림: Le Docteur Festus(1840)

         

  로돌프 퇴퍼의 낭만주의 기획은 이로써 끝을 맺는가. 아니다. 퇴퍼가 창조한 판타스마고리아는 여기서 그치기를 원치 않는다. 칸의 운동은 더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퇴퍼의 비판은 한층 더 신랄해진다. 그는 진보를 전 세계를 휘감는 인과의 소용돌이 그리고 정신을 관통하여 카오스 상태로 몰고는 전염성 질환이라고까지 힐난한다. <Le Docteur Festus>(1840)에서 풍차가 그로테스크하게도 날개에 매달린 인간과 심지어 주위의 모든 돼지까지 미친 듯이 날려버린 것은 그래서다. 칸과 칸의 연쇄작용은 처음에는 인과성의 기계 장치로 다음으로는 세부적 요소가 누적되다 한 순간 휘몰아지는 악마적 장치로 전화(轉化)된다. 그로테스크의 대가 피셔는 이러한 소용돌이의 법칙을 일찌감치 간파하였다. 그는 퇴퍼의 세계를 “한 인간이 처음 운명에 노출되고 거기에 얽혀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미친 듯이 굴러가는 세계의 수레바퀴는 그의 손가락, 혹은 옷자락을 거칠게 낚아채고 냉혹하게 끌고간다”라고 묘사 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그랬다. <Le Docteur Festus>의 과학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행하지만, 세계는 갈수록 생경해지며 종국에 현실과 꿈의 경계는 와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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