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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Jun 30. 2021

위대한 여성 만화가는 누구일까

 


 위대한 여성 만화가는 누구일까? 미국 초기 만화의 정전에서 여성작가의 이름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만화 역사의 범위를 2000년대로 확장한다 해도 이 결과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약간의 여성작가가 덧붙여지긴 하지만 그 보다 훨씬 많은 남성작가가 위대한 작가의 목록에 포함된다. 이 사실은 놀랍지 않다. 미국만화 산업은 전형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특징지어지며 작가, 편집자 같은 업계 종사자 대다수 역시 남성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남성적 주제에 지배된 슈퍼히어로, 여성혐오적 이미지로 구성된 코믹스(Comix), 여성배제적   남성 영토 팬 숍 등은 성차별적인 미국 만화의 표면적 징후다.

  이러한 점에서 70년대 린다 노클리의 문제의식은 여성 만화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여전히 좋은 출발점이 된다.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전제에 의문을 제기했고, 이 같은 질문은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나올 수 없던 이유 즉 여성억압적 구조를 은폐한다 말한다. 따라서 여성 만화사를 서술하기 위해선 정확힌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통해 여성 만화가가 어떻게 당대의 경제사회적 환경과 조응하며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펼쳐내는지를 보여야 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주의할 지점은 여성 만화가의 삶을 섣불리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성공과 실패는 대립적이기 보다 차라리 서로가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다. 장식미술에 대한 19세기 미국 여성예술가들의 극명한 태도 차이를 보자. 미술가 세실리아 보에게는 장식미술은 아마추어 여성 미술을 상징하는 경멸의 대상이었지만, 반면 삽화가 앨리스 바버 스티븐스에게 장식미술은 생계와 예술적 이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또한 성공과 실패에 관한 여성작가의 복잡한 심경은 만화가 데일 메식의 간결한 소회에서도 잘 드러난다. “8명의 무명 화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큰 성공이었죠. 나는 시카고 트리뷴, 뉴욕 뉴스 신디게이트에 들어갔고, 나는 유일한 여성이었습니다. ... 나는 결코 진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산업, 제도, 일러스트

 미국 여성 만화사를 본격 논의하기 전 먼저 19세기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살펴보자.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는 여성 만화가가 활동하기에 앞서 여성 예술가의 길을 개척한 선구자다. 직업의 제한과 사회적 제약의 어려움에도 여성인 이들이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일러스트에 대한 급격한 수요 증가다. 19세기 미국은 산업의 발전, 중상층의 확산, 공교육의 보급으로 책, 신문, 잡지와 같은 출판물의 수요가 급증하며 이로 인해 일러스트 즉 그림에 대한 수요도 함께 증가한다. 둘째 여성 예술가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기여한 예술 교육기관의 설립이다. 1870년대 유럽산 미술품의 수입으로 위기감을 느낀 미국 미술계와 산업계는 유럽 미술과 경쟁할 예술가를 양성하기 위해 전국 주요 도시에 미술학교를 설립 한다. 이렇듯 미국의 경제사회적 변화는 여성 예술가의 사회적 진출에 결정적 동력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의문은 남는다.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어떻게 다른 영역의 여성보다 일찍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는가. 19세기 미국 미술계는 어느 정도 여성 예술가에게 관대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장식미술과 상업미술의 영역에 한해 여성의 진입을 허용했다. 순수 미술의 경우 아카데미 교육과 유럽 유학을 통해 여성 예술가를 계속해 제한한다. 일러스트는 열등한 미술로 간주되기에 여성에게 가능한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린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남성에게 수혜 받은 수동적 존재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은 남성 세계에 가담하면서도 동시에 그 세계와 불화하며 새로운 길을 내려 애썼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미술 학교는 여성에게 중등교육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었고 또한 미술 교육은 여성에게 더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통로였다. 더욱이 일러스트는 예술적 이상을 추구하는 창조적 작업이며 동시에 경제적 자립 때에 따라선 큰 부를 획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미술 역사가 린다 노클린이 여성 미술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일러스트가 속한 장식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러한 역동성 때문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19세기 대표적인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앨리스 바버 스티븐스’의 삶을 짚어 보자. 앨리스 바버 스티븐스(Alice Barber Stephens)은 필라델피아 여성 디자인 학교를 졸업하고 1876년 펜실베니아 미술 아카데미(PAFA)의 최초 여학생 중 한명으로 입학한다. 그는 이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며 이 과정에서 동료 여성 예술가를 지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자신의 모교인 필라델피아 여성 디자인 학교에서 여성 예술가를 양성하고, 1897년에는 남성으로만 구성된 필라델피아 스케치 클럽에 대한 단호한 대응으로 자신의 제자 샬롯 하딩과 함께 플라스틱 클럽을 창립한다.

 스티븐슨의 이 같은 여성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은 무엇보다 PAFA의 누드 수업 일화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여성 미술가는 누드모델의 드로잉이 금지됐다. 이 제도는 여성 미술가를 배제하는 효율적 제도로서 아카데미의 필수 요소인 신체 묘사를 여성이 습득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스티븐스를 포함한 PAFA의 여학생들은 여성 차별적 제도에 반발했고 그들은 그리하여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미술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승리를 거둔다. 스티븐스의 <Women's Life Class>(1879)는 다름 아닌 이 기념비적 사건을 기록한 작품이다. 1771년에 제작된 요한 조파니의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와 비교해 본다면 PAFA 여학생의 승리는 한층 더 선명해진다. 누드 수업을 참관한 아카데미 회원의 모습을 담은 <왕립 아카데미 회원들>에서 여성 미술가는, 실제의 모습이 아닌 액자 속 초상화로 재현된다.      


<Women's Life Class> (1879)


 신여성을 그리다

 1890년 <라이프>지에 등장한 ‘깁슨 걸’은 미국 대중매체에 의해 최초로 시각화된 미국 여성상이다. 깁슨 걸은 빅토리아 여성을 대체한 여성상으로, 신여성이라는 변화된 미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신여성과 깁슨 걸과의 연계성에도 긴 머리를 느슨하게 틀어올린 이 여성 이미지는 어느 정도 왜곡돼 있다. 응접실에선 우아하고 야외에선 활동적인 여성 그러니까 깁슨 걸은 남성적 시각으로 구성된 미국의 여성상이다. 찰스 깁슨은   운동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한편으론 여성이 운동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걸 경계했다. 또한 개혁을 지지하지만 개혁적 여성을 지지하지 않는 깁슨은 정치적 여성을 그리지 않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그려야 할 땐 그들을 완고하고 뚱뚱한 여성으로 재현했다. 깁슨 걸의 이미지를 앨리스 바버 스티븐슨의 <Woman Business>(1887)와 비교해보자. 젠더에 대한 최초의 시각적 논평으로 평가받는 스티븐슨의 작품에서는 여성노동자를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여성을 판매대 중심으로 신중하게 배치한다.


 동일한 신여성이  이토록 상이하게 재현된 걸까.  작가의 성별  때문이라 한다면 틀린 답은 아니지만 이보다 흥미로운 답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여성을 그린 스티븐슨 본인이 다름 아닌 신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스티븐슨은 신여성을 그리는 신여성이다. 당연히 이것은 앨리스 바버 스티브슨만의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1920년대 만화가  브링클리(Nell Brinkley) 플래퍼를 재현하는 동시에  자신이 플래퍼의 삶을 구현한다. 플래퍼(Flapper) 1920년대 전통과 인습을 무시한 신여성이다. 그들은 코르셋 입기를 거부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짧은 스커트를 입고 공공연히  마시고 담배를 폈다. 기성세대에게 부정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여성상은 많은 여성에게 수용됐고  나아가 20년대 미국 대중문화를 사로잡았다. 플래퍼는 문화적 기표로 소비문화의 상징, 재즈 시대의 자화상  다양한 이미지로 재현되며,   ‘브링클리   브링클리가 창조한 플래퍼 이미지다.


  눈썹 커다란 눈과 곱슬거리는 단발머리의 블링클리 걸은 잡지 혹은 신문의 지면을 유려한 아르누보 선으로 수놓는다.  뿐만이 아니다. 대중가요의 노래가사, 무성영화의 여배우 때론 광고 이미지와 캐릭터 상품에서도 브링클리 걸의 모습을 발견할  있다. 하지만  브링클리가 특별한 예술가인 이유는 단순히 20년대 신여성 플래퍼를 매혹적으로 재현해서만은 아니다. 그보다 브링클리의 작품에 스며든 여성적 야심, 세련된 스타일, 진보적 계급의식이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남성작가 그린 플래퍼는 많은 경우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여성으로 재현됐다. 하지만  브링클리의 플래퍼는 이와 달랐다. 여성 참정권 시기 여성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불어넣었고 이후에도 여성 노동자를 격려하며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려 했다. 플래퍼를 미국 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에 과감히 도전함으로써 여성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 신여성으로 정의한다 해보자. 그렇다면  브링클리와 그의 작품  브링클리 걸은 정말로 신여성인 플래퍼다.     


<Golden Eyes and Her Hero Bil>(American Weekly, Apr 28, 1918)


모험하는 여성, 액션하는 여성

 19세기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 미술가와 달리 매우 제한된 주제만을 다뤄왔다. 역사화에 접근할 수 없던 여성 미술가는 이보다 사소한 장르인 초상화, 정물화, 풍속화에 전념해야 했다. 게다가 여성 미술가를 제한하려는 시도가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데, 가령 남성성과 대비되는 열등한 속성(우아함, 감성적, 모성애)을 여성 미술가의 작품에 귀속시킨다. 그리고 동시대의 미국 만화계도 정확히 이런 방식으로 여성 만화가의 가능성을 봉쇄한다. 여성 만화가는 아기, 동물과 같은 귀여운 캐릭터와 일상적인 가정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그릴 것을 요구받았다. 반면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정치 카툰과 액션과 큰 세계에 집중하는 액션모험 장르는 남성 만화가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성 만화가들이 언제까지나 남성이 규정한 경계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주제의 범위를 점차적으로 넓혀갔으며 종국에 이르러선 작품 속 여성의 속성도 함께 변화시킨다. 가령 버지니아 휴젯(Virginia Huget)은 여성 주인공을 노동자로 설정해 플래퍼의 이미지를 확장시켰고, 재키 오메슨(Jackie Ormes)는 흑인 여성의 경멸적인 캐리커처에 도전하며 자신의 독립적 주인공으로 노동, 교육, 불평등 같은 사회적 의제를 논평했다.     


  이 후 만화 속 여성 주인공은 직업여성으로서 가정 너머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2차 세계대전 무렵엔 마침내 모험을 떠나는 액션 영웅으로 거듭난다. 데일 메식과 타프 밀스는 여기서 이 새로운 만화의 흐름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우선 만화가 데일 메식(Dale Messick)을 살펴보자. 데일 메식은 전성기 시절 250여개의 신문에 작품이 실리며 6천만 명 이상의 독자를 가진 최고의 여성 만화가였다. 더군다나 여성 만화가를 완강히 거부한 조지프 패터슨과의 일화는, 여성 작가가 만화계의 차별과 배제를 어떻게 우회하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New York Daily>와 <Chicago Tribune New York News Syndicate>의 대표 조지프 패터슨은 여성 만화가를 인정하지 않았고 여성 만화가가 보낸 모든 작품을 쓰레기통에 내버렸다. 데일 메식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때 메식의 재능을 알아본 패터슨의 여비서 몰리 슬롯은 몇 가지 수정을 제안한다. 주인공의 직업을 도적에서 기자로 또한 남성 편집자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이름을 달리아에서 데일로 바꾸라는 것이다. 이에 메식은 충고를 받아들였고 <Brenda Starr>는 그제 서야 1940년 6월 역사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데일 메식은 하지만 이 미완의 승리에 충분히 만족할 수 없었다. 여성 기자의 제한된 역할에 진절머리가 났고, 주인공 브렌다가 <Tarzan>(1929), <Dick Tracy>(1931), <Flash Gordon>(1934)와 같은 동시대 남성 영웅처럼 되기를 원했다. 결국 붉은 머리의 브렌다는 도시와 정글을 오가며 남성 악당들을 물리치고 때로는 연인과 열정적인 로맨스를 갖는 여주인공으로 재창조된다. 물론 재조정된 여성 주인공의 역할 달리 말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충돌을 대중들이 전적으로 환영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 특히 어린 소녀들은 <Brenda Starr>를 여전히 읽기 원했다. 남성만이 할 수 있다 생각되어온 일들을 여성인 브렌다가 훨씬 더 훌륭하게 해결해냈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렌다의 팬인 <LA Times> 클라우디아 루터 기자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언급한다. “<Brenda Starr>가 그려낸  놀랍고도 엄청난 저널리즘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와 미스터리를 평생토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Brand Starr> #14 (1955)


  데일 메식에 이어 마지막으로 다룰 작가는 여성 슈퍼히어로를 그린 타프 밀스(June Tarpé Mills). <Wonder Woman> 많은 이들에게 최초의 여성 슈퍼 히어로 만화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타프 밀스의 <Miss Fury> 41 <Wonder Woman>보다 반년 앞서 코믹 스트립에 등장했다. 그러면  <Miss Fury> 여성 히어로 만화의 계보에서 오랫동안 잊힌 걸까. 그것은 망각이라기보다 오히려 의도적인 누락에 가깝다. <Miss Fury> 결코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작품이 아니다.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장기 연재됐으며 연재된 내용을 묶은 단행본은 백만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심지어 작품 속에 등장한 고양이 캐릭터는 2 세계 대전 미국 군함의 마스코트가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따라서 <Miss Fury> 만화계에서 지워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할  있겠다. <Miss Fury> 남성 히어로가 아닌 여성 히어로라서 더욱이 남성 작가가 아닌 여성 작가가 의해 그려져서라고. 거칠게 들릴  있지만 2 세계 대전 전후의 변화된 여성 위상을 고려한다면  추론은 비약적이지 않다. 2 세계 대전은 전례 없는 많은 수의 여성이 공적인 업무에 참여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여성 노동력이 전쟁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정부는 ‘We can do it’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의 사회 참여를 격려한다. 만화 산업에서도 징집된 남성 만화가를 대신할 여성 만화가를 적극 받아들인다. 여성 만화가의 수는  결과 1942년에는 3배로 늘어났는데 이때 주목할 지점은 여성 만화가의 증가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의 증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Miss Fury>부터 <Wonder Woman>까지 여성 히어로 주인공이  시기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Miss Fury> 2 세계대전에 활동한 진취적 여성의 기념비적 반영이었다. 하지만 2 세계대전은 여성에게  번은 희극으로, 다른  번의 비극으로 끝나버린다. 2 세계 대전이 끝나고 군인들이 귀국하자 미국은 급작스런 보수적인 반동이 일어난 것이다. 여성들은 대량으로 일자리를 잃었고 사회는  이상 당당하고 독립적인 여성을 요구하지 않았다. 만화계 역시 여성 만화가를 점진적으로 퇴출시켰으며 만화 산업이 호전된 1960년대 말쯤에는 여성 만화가 대부분 사라진다. 1952 타프 밀스의 은퇴는 이러한 백래쉬와 보수적 반동의 명백한 예시다. 50년대 정신과 의사 프레드릭 웨덤은 자신의 저서 <Seduction of Innocent>에서 만화가 청소년에게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고 비난한다.  주장은 메카시즘으로 경직된 미국 사회에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이후 혹독한 만화 검열로까지 이어진다. 모든 만화가 검열을 받았지만 이때 타프 밀스의 만화는 공포, 범죄  일반 슈퍼히어로 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격 받는다. 타프 밀스는 과거 패션계에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 Miss Fury>에서는 단일한 코스튬 대신 다채로운 화려한 의상을 선보인  있다. 그런데  선구적 의상은 집중적 비난의 대상이 됐고 특히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hellfire’라고 비난 받는다. 이에 신문사들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Miss Furry> 검열하는데, 1946년에는 37개의 신문사들은 여성 악당의 의상 문제로 <Miss Fury> 거부했고 <Boston Globe>같은 몇몇 신문사의 경우에는 여주인공이 겸손히 보이도록 하기 위해 검열을 이용했다. 타프 밀스는 사회적 압력에 굴복했고 <Miss Fury> 그렇게 만화의 역사에서 지워진다.     


<Miss Furry> #6 (1944~1945)


맺음말

 미국 여성 만화사를 언급하긴 했지만 이 글은 새로운 만화사를 구성하려는 야심찬 글은 아니다. 소박하게나마 알려져 있지 않던 여성 만화가를 소개하고 가능하다면 이 과정에서 여성차별 구조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려 했다. 이 글은 여성 만화사의 탐색작업으로 일종의 스케치에 가깝다. 당연히 다루지 못한 영역은 넘치기 마련이고, 이것은 이 후 여성 만화사를 조명할 여러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끝으로 특정 시대 특정 얼굴을 한 여성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여성차별과 사회적 압력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는 이 어려움 속에서도 빛나는 재능과 끈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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