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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Sep 26. 2021

<땡땡의 모험>: 명료한 선으로 연역된 추상적 세계

 

 타원형의 얼굴, 또렷한 눈동자, 살짝 세운 앞머리 누구나  번쯤은 <땡땡의 모험> 주인공 ‘땡땡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땡땡의 모험> 70 이상의 언어로 출판되어 2  이상 판매된 세계적인 작품이다. 게다가 <땡땡의 모험> 에르제 사후에도 많은 이들을 사로잡고 있는데, 지금도 세계의 주요 도시에는 <땡땡의 모험> 관련된 전시가 진행 중이다. 1930년에 시작된 <땡땡의 모험> 이토록 오랜 기간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험 만화여서? 모험이 주는 체험은 여전히 매혹적이지만 초창기 독자들이 느꼈을 이국적 경이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러면 <땡땡의 모험> 관한 에르제의 언급을 참조해보자. “나는 매우 선형적이고 단순한 시나리오에서 시작한다. 처음 스토리는 미리 구상된 아이디어 없이, 어떤 시나리오도 없이 이어지는 개그의 단순한 연속이다. 그러고는 스토리를 끝마치겠다고 생각하면 개그를 마무리함으로써 끝맺는다.”


 그렇다. <땡땡의 모험> 서사는 모험으로 촉발되지만, 서사의 주요 동력은 슬랩스틱 개그다. 심지어 땡땡이  세계를 모험하는 이유는 슬랩스틱을 가능한 많은 공간에 연출하기 위해서인 것만 같다. 그런데 땡땡의 슬랩스틱 장면은 어딘가 이상하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땡땡의 모습이 놀라울 만큼 정적이다. 만화의 이미지가 정지된 이미지라는 원론적 말을 하려는  아니다. 극적인 상황에서도,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도 땡땡의 형상은 조금도 흐트러져 있지 않다. 무엇이 땡땡을 이렇게 무겁게 억제하는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땡땡의 형상이 일정한 굵기의 검은   명료한 (Clear Line)으로 둘러싸여 있어서다. 명료한 선은 <땡땡의 모험> 있어 본질적 요소다. 재현뿐만 아니라 서사의 구성, 세계의 관점, 독자의 가독성과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땡땡의 모험> 논의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명료한 선이 무엇인가. 명료한 선은 무엇을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시각적 형식과 서사의 세계로 확장되는가.     



명료한 선의 계보

 명료한 선은 에칭을 최대한 자제하고 사물의 형상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객관적 선이다. 사실 명료한 선은 에르제의 고유한 형식은 아니다. 그래픽 디자이너로도 활동했던 에르제는 일러스트의 작업에서 이미지 가독성의 중요함을 배웠다. 이보다 직접적으로는 <Zig et Puce>의 작가 알랭 생 오간(Alain Saint Ogan)에게 영향을 받았고, 오간의 명암을 제한한 뚜렷한 윤곽선은 에르제가 클리어 라인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이처럼 명료한 선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뚜렷하고 연속적인 선, 세부를 생략하고 본질을 강조한 선은 에르제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에르제가 관심을 기울인 미술 작품 무엇보다 그의 스튜디오 벽에 수년간 걸려있던 작품을 중심으로 명료한 선의 계보를 구성해보면 어떨까. 먼저 루치오 폰타나 작품에 그어진 선 다시 말해 칼로 베어낸 절대적 선에서 우린 에르제의 명료한 선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에르제가 가장 매료된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으로, 에르제가 주장하듯, 리헤텐슈타인의 작품은 <땡땡의 모험>과 단순화(simplication)라는 방법론을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현대 회화를 건너뛰어 전통회화 한스홀바인의 초상화를 살펴보자. 한스 홀바인의 등장이 갑작스럽긴 하지만 그는 초상화의 대가이자 동시에 드로잉의 대가였다. 그의 드로잉은 명료한 선처럼 입체감 주는 명암법을 극도로 제한하는 뚜렷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한다.      

 

  이렇게 명료한 선의 계보를 구성했으니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명료한 선을 만화사적 맥락에 위치시켜보자. 선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조직하는 기능을 한다. 부연하자면 평면의 경계를 설정하고 또한 형상의 윤곽을 규정 한다. 선은 이 같이 그림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지만 역설적이게도 현실의 대상에는 윤곽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은 그 자체로 추상적인데 바로 이러한 속성 때문에 선은 카툰화의 핵심적 조형요소로 성립된다. 특히 본질을 위해 부수적인 것을 제거하는 명료한 선의 개념은 세부 묘사를 없애고 핵심 의미가 나올 때까지 주어진 형상을 벗겨내는 카툰화의 개념과 상당한 친연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명료한 선은 카툰화의 지배적 양식일까. 초기 만화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에 대합 답은 그렇지 않다. 초기 만화에서 명료한 선은 부차적 양식이었다. 오히려 지배적 양식은 명료한 선과 대척점에 있는 캐리커처로 대표되는 유기적 선이다. 윌리엄 호가스의 <The Analysis of Beauty>를 보자. 호가스는 선을 다양성과 감정이입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자연에서 관찰할 수 있는 구불구불한 곡선을 이상적인 미로 규정한다. 더욱이 윌리엄 호가스의 유기적 선은 이후 영국 캐리커처 작가를 거쳐 로돌프 퇴퍼의 그로테스크한 선으로까지 계승된다. 그런데 이때 보다 주목할 지점은 유기적 선과 명료한 선과의 관계다. 호가스는 주관적이고 복잡한 유기적인 선을 미적 양식으로 채택한 반면, 엄격하고 객관적인 그래서 기계를 연상하는 명료한 선은 유머와 풍자를 목적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유기적 선과 명료한 선의 이항대립은 근대 만화에서 현대 만화로의 전환기에도 만화의 주요 관습으로 존중되며, 예를 들어 리처드 F. 우트콜트 (Richard F. Outcault), 지미 스위너튼 (Jimmy Swinnerton), 프레데릭 버 오퍼 (Frederick Burr Opper)는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작품에 명료한 선으로 이뤄진 기계적 캐릭터를 활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명료한 선의 땡땡 역시 호가스의 전통을 계승한 캐릭터로 생각할 수 있는데, 설사 생동감 넘치는 매력으로 많은 이를 매혹시킨다 할지라도 땡땡의 도식적 형상과 반복적 행동은 기계적 메커니즘의 일부로 수렴된다.      


  유기적인 선과 명료한 선을 대립쌍으로 설정하긴 했지만 사실 두 선은 상이한 외양에도  추상화와 도식화라는 동일한 목적을 공유한다. 다만 단순/복잡, 정적/동적, 주관/객관, 유기적/기하학적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유기적인 선과 명료한 선으로 나뉘게 된다. 그렇기에  유기적 선과 명료한 선의 이항 대립은 미술, 만화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선의 관점에 따라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된다. 미술사가 하인리 뵐플린은 <미술사의 기초 개념>에서 선/회화, 평면/깊이, 폐쇄/개방, 명확성/불명확성, 다양성/단일성의 5가지 개념 쌍으로 르네상스 미술과 바로크 미술을 비교한 바 있다. 또한 이후 유럽 아카데미에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대립의 연장으로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그리고 푸생과 루벤스를 대비하며 오랜 기간 미술적 논쟁을 이어왔다. 60년대 일본만화의 두 개의 큰 흐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와 반(反)데즈카인 극화를 선으로 추상화 하다면 그것은 각각 명료한 선과 유기적인 선으로 환원 가능하다.      



구성과 추상의 변증법

  명료한 선은 <땡땡의 모험>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될까. <땡땡의 모험>에 등장하는 슬랩스틱 장면을 보자. 땡땡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슬랩스틱 장면은 앞서 언급했듯 이상하다. 명료한 선이 땡땡의 움직임을 억제한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한편으로 연속되는 장면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어긋나 있다. 칸과 칸 사이의 간격 그러니까 한 행동에 이은 다른 행동 사이의 간격이 넓어 <땡땡의 모험>의 운동 이미지는 연속적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비약적이다. 에르제는 어떠한 이유로 칸의 연속성을 경시한 걸까. 이는 에르제가 전통 회화의 구성과 통일성에 몰두한 작가로서 “회화는 행동의 단일한 순간만을 쓸 수 있으므로, 반드시 가장 많은 것이 잉태된 순간, 이전 행동과 이후 행동을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순간을 선택해야 한다”는 고트홀트 레싱의 생각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 영원한 것에 대한 추구. 명료한 선에서 연역된 또 다른 방식의 명료함. <땡땡의 모험>의 각 칸들은 자족적 존재를 내세우며 칸의 연쇄 운동에 일방적으로 종속되기를 거부한다.  

 

 <땡땡의 모험>의 칸은 이처럼 시간보다 공간의 우위를, 운동보다 형상의 우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땡땡의 모험>이 칸의 연속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 같은 긴장과 모순을 통해 <땡땡의 모험> 특유의 역동적 운동 발생시킨다. <땡땡의 모험>에서 균등하게 분할된 칸은 명료한 선만큼이나 중요한 미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우선 칸으로 엄밀히 구획된 땡땡의 슬랩스틱 공간은 기하학적 미로로 기능한다. 그리고 횡적으로 일렬 배치된 칸은 통로 기능을 수행하며 땡땡과 독자의 시야를 터널 비전(Tunnel Vision)으로 제한한다. 때때로 바닥은 상황과 무관하게 내려앉으며 주인공 땡땡을 지하로 추락시키는데, 이는 서사적 개연성이라기보다 차라리 미로 형식의 필연성처럼 보인다. 여기에다 운동의 측면에서 동일한 칸, 동일한 간격의 칸은 마이브리지 그리드의 기계적 운동형식을 사용한다. <땡땡의 모험>은 칸-기계가 되어 끊임없이 칸을 생산하며 이어서  칸의 연속체에 고유한 형상, 구도, 운동을 가진 하나의 총체로서의 이미지가 배치된다. 당연히 닫힌 집합으로서의 이미지는 칸의 열린 전체 운동을 쉽사리 지지하지 않는다. 칸과 칸 사이엔 시각적이자 의미론적인 충돌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칸의 누적으로 등차수열의 구심적 운동이 발생할 때면 상충하는 이미지는 다소 과격하게 연쇄된 칸의 흐름 속에 욱여넣어진다. 매끄럽게 통합되는 운동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신 우당탕거리고 시끌벅적한 슬랩스틱의 운동을 생생하게 전하게 된다.     

 

 이렇듯 <땡땡의 모험>에서 칸과 이미지의 결합은 이질적 요소의 상호 작용 속에 새로운 통합을 구축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에서 운동으로의 환원은 추상 미술의 깊은 관심에도 평생 구상적 작업에 전념해야 했던 에르제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며 앞으로의 추상적 만화를 예고한다. <땡땡의 모험>의 추상적 속성은 추상만화 작가 알렉시스 뷰클레어 (Alexis Beauclair)의 논평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땡땡의 모험>을 걷고, 달리고, 점프하고, 추락하는 계열체의 종합 즉 운동으로 규정한다. 구상과 추상 형식의 이질적 공존. 추상적 만화라는 진전된 논의를 위해 <땡땡의 모험>의 후기작 <카스타피오레의 보석>를 면밀하게 검토해보자. 에르제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작업에서 나의 목표는 더욱 더 단순해지는 것이며 또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국적 풍경, 만화의 전통적 관습, 악당, 서스펜스와 같이 모험이라 여겨지는 어떠한 것도 포함하지 않은 채.” 달리말해 명료한 선의 개념을 확장해 세계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재현하는 것과 동시에 세계를 추상적 기호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레 에르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의 구상을 어떻게 추상적으로 조직할 것인가. 이에 에르제는 칸딘스키, 몬드리안의 모더니즘 기획과 같이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에 음악을 도입한다. 소리(말풍선)는 오페라 디바 카스타피오레가 열창하는 모습을 담은 표지에서 암시하듯 특권적 존재다. 가령 정전 에피소드는 어둠이 발화의 주체를 모두 지우고 오직 말풍선만을 남겨놓으며 그것의 특권적 존재를 분명히 한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주체 또는 주체에서 독립된 소리는 칸을 차례로 밀어내어 공간을 확장시키며 더 나아가 앞으로 등장할 누군가를 예고하거나 아니면 일련의 연쇄 반응을 야기한다.


<카스타피오레의 보석>


  분명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에서 소리와 이미지가 결합되는 양상은 흥미롭다. 하지만 아직 음악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는데 그래서 에르제는 다음의 작업으로 <카스타피오레의 보석> 자체를 악보 형식으로 구성한다. 이런 에르제의 공감각적 작업은 후기 에이젠 슈타인의 수직적 몽타주와 무척이나 흡사해 보인다. 수직적 몽타주는 오케스트라처럼 각각의 감각적 요소들이 독립적인 진행을 하면서도 총체적 앙상블에 기여하는 수평적으로 전개되는 수직적 구조를 가진다. 예컨대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은 실내의 밝음과 야외의 어둠, 현실의 견고한 형상과 TV의 변형된 형상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대위법을 구사한다. 또한 초인종 소리에 이은 외부인의 등장, 앵무새와 병치된 아독 선장의 통화, 계단에서 ‘콰당’하며 넘어지는 사람과 같은 운동의 계열체는 인과성, 동시성, 완결성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때 각 운동 계열체는 변주를 통한 반복으로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에 음악적 리듬을 부여한다. 형상, 색체 그리고 운동의 주제로 묶은 계열체로 음악적 태피스트리를 직조한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연쇄된 칸의 악보를 단순히 수평적으로 읽어내선 안 된다. 보다 능동적으로 연쇄된 칸의 악보를 수직적 구조로 병치해 고유의 오케스트라를 연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안드레이 몰로티우(Andrei Molotiu)가 제안한 다성음악 만화(sequential-art polyphony)는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에 관한 탁월한 분석중 하나다. 몰로티우에 따르면 에르제는 하나의 칸 또는 연쇄 칸에서 둘 이상의 서사를 동시에 배치하는 만화 매체의 특성에 주목하여 깊이를 가지는 공간에 다양한 조합이 가능한 인물들을 배치한다. 땡땡, 아독 선장, 해바라기 박사, 카스타피오레 등의 인물들은 독립된 하나의 선율이 되고, 그들은 이어 전경과 배경을 우아한 몸짓으로 오가며 서로 연결되기와 분리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거기에 깊이의 변화와 시점의 이동마저 더해질 때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의 선율은 더욱더 풍부한 화음으로 확산된다. 에르제는 앤디 워홀에게 자신이 팝아트 작가로 고려될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앤디 워홀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 “에르제는 월트 디즈니만큼이나 나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라고 상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약 <땡땡의 모험>을 정말로 진지하게 읽었다면 워홀은 이렇게 답해야 하지 않을까. “팝아트 작가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에르제 당신의 만화는 현대 미술의 추상적 작업을 상기시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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