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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Jan 16. 2022

<Little Nemo>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서 만나요



 영화 감독 테리 길리엄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환상적 영화를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나와 펠리니는 만화가라는 같은 배경에서 나왔고 세계를 늘리고, 당기고, 왜곡했습니다.” 테리 길리엄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출발점으로 만화를 지목한 것이다. 이 주장은 펠리니 영화의 낙천적 기괴함을 떠올리면 놀랍진 않지만 어쨌든 펠리니의 본격적 영화경력이 네오리얼리즘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흥미롭다. 이러한 이유로 테리 길리엄의 주장을 더 밀고 나가 만화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관계를 진지하게 검토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만화가 펠리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페데리코 펠리니는 20대 초반 <Marc'Aurelio>, <Florentine magazine 420>에 만화를 기고한 글자 그대로 만화가였다. 다음으로 영화 속 배우를 걸어 다니는 캐리커처로 만들었다는 비난은 어떠한가. 근거가 전혀 없는 비난이라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실제로 펠리니는 영화 캐릭터를 드로잉으로 구축하고 나서야 관련 배우의 캐스팅을 시작했다. 거기에 유년 시절 페데리코 펠리니의 에피소드도 추가해보자. 미국 코믹 스트립에 빠져든 어린 펠리니를 발견할 때면 우리는 비로소 “영화는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영화감독 펠리니의 주장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특히 침대 옆에 놓을 정도로 매혹된 <Little Nemo>의 경우 침대 위 어린 아이, 고층빌딩 옆 거대한 여인 그리고 세트장을 행진하는 광대의 모습으로 영화에 다시금 등장한다.

 

 그런데 페데리코 펠리니의 관한 이야기를 왜 이토록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까. 이 글은 원래 윈저 맥케이와 <Litttle Nemo>에 관한 글이 아닌가. 페데리코 페리니가 <Little Nemo>의 열렬한 독자였다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분명 지나치다. 사실 이렇게라도 무리하여 논의를 끌고 온 이유는, 윈저 맥케이, 페데리코 펠리니 두 작가가 공유했을 무언가를 도출하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 펠리니의 고향 리미니에는 카니발과 서커스 그리고 순회 보드빌 극단이 해안을 누볐다. 또한 초년생 윈저 맥케이는 구경거리 박물관(dime museum)에서 환영의 원리를 습득했고 이후에는 누구보다 빠른 드로잉 실력으로 보드빌의 유명인사로 활약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윈저 맥케이와 페데리코 펠리니는 축제, 마술, 광대, 서커스, 놀이공원 같은 ‘카니발적 환상’을 공유한다고. 더욱이 카니발적 환상을 1900년대 시각예술의 맥락에 배치한다면 이번에는 르네 마그리트를 맥케이와 팰리니 사이에 위치시킬 수 있다. 마그리트 역시 영화, 놀이기구, 서커스의 원형 무대 같은 매력적 볼거리에 매혹됐고 이 모든 것은 다시 마그리트의 예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근대적 시각예술과 세기 전환기 대중문화와의 경이로운 만남. <Little Nemo>의 출발점은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윈저 맥케이

 1968년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만화사에서 오랫동안 망각된 윈저 맥케이를 재조명한다. 윈저 맥케이를 당대의 위대한 혁신가로 소개하며 브뤼헐에서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미학적 계보에 속한 인물로 평가한다. 윈저 맥케이는 ‘꿈’을 통해 코믹 스트립 세계에 전례 없는 구멍을 냈고 이때의 꿈은 다름 아닌 프로이트와 초현실주의가 몰두했던 주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다. 시기적으로 초현실주의 보다 먼저 등장했기에 초현실주에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예고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윈저 맥케이를 초현실주의자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가 지적했듯 20세기 진취적 예술가는 대부분 그렇듯 넓은 의미에서의 초현실주의자였다. 가령 <Little Nemo>는 초현실주의자에 앞서 키리코의 얼어붙은 도시, 달리의 그로테스크한 신체, 마그리트의 환영적 이미지와 같은 초현실주의적 기호를 선취한다. 게다가 서사의 측면에서 보면 <Little Nemo>는 앙드레 브르통의 소설처럼 대상은 희귀하고 장소는 낯설며 만남은 갑작스럽지만 이 모든 것은 반복에 사로잡혀 있다. 주인공의 이름(nemo) 또한 ‘아무도 아닌 자(no one)’로 이러한 맥락에서 네모가 첫째 칸에서 마지막 칸으로 이어지는 긴 모험을 마칠지라도 우린 막상 그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꿈에 관한 몇몇 편린에 불과하다. 그래서 <Little Nemo>의 진정한 주인공은 네모라기보다 차라리 무의식으로 가는 통로 꿈이다. 이를 두고 초현실주의 시인 브로통은 말한다. “네모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오직 꿈 안에서만 계속 된다.”     


 우리는 이처럼 <Little Nemo>에서 경이로운 초현실주의 세계를 발견한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다음의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윈저 맥케이는 어떻게 하여 초현실주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을까. 만약 만화의 무의식이 지시했다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미술의 재현에 초연한 만화를 중재하여 표현주의를 이끌어낸 도미에의 작업을 고려하면, 다시 한 번 만화라는 양식이 초현실주의에 앞서 꿈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설사 그 꿈의 세계가 초현실주의의 무의식으로 인식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윈저 맥케이의 논평을 직접 인용해보자. “삶을 모방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자신을 직접 본 것을 그린다. 그런 사람은 예술가다. 하지만 만화가는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활력과 위트가 넘치면서도 긴장과 비극으로 각인될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더구나 만화의 역량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저급 예술이라는 만화의 열등한 위치마저도 초현실주의로 이끄는 길을 선점케 한다. 서커스와 보드빌, 영화관과 환상적 볼거리, 박람회와 놀이공원 같이 고급 예술이 선뜻 다가서지 못한 카니발적 주제를, 고급 예술의 관습에서 자유로운 만화는 아무 거리낌 없이 게걸스레 먹어치운다.


 다만 이때 오해해서 안되는 건, <Little Nemo>의 초현실주의가 단순히 카니발적 무대를 연출해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Little Nemo>의 세계는 무대보다 한 층 더 깊은 내부를 가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Little Nemo>가 만들어낸 원근법은 무대를 넘어 건축 그리고 도시 공간으로 까지 확장된다. 윈저 맥케이는 원근법의 정립자이자 건축가인 브루넬레스키처럼 1900년대 미국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꿈의 세계에 강박적으로 배치한다. 이 기념비적 건축물은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뉴욕 코니 아일랜드의 루나파크와 드림랜드 그리고 189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의 화이트 시티(White City)를 아우른다. 특히 장엄하게 늘어선 신고전주의 건축물과 거대한 바퀴 모양의 회전 놀이기구 페리스 휠이 공존하는 화이트 시티는 ‘가장 미국적 상상이 충족되는’ 카니발적 환상의 공간이었다. 다시 한 번 부연하면 <Little Nemo>는 원근법을 통해 구축된 꿈의 세계다. 원근법이 2차원 평면에 3차원 환영을 투영하듯 현실 세계에 꿈의 세계를 재현한다. 물론 매혹적인 이미지와 별개로 이미지의 표면 아래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환영이다. 윈저 맥케이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Little Sammy Sneeze>, <Dream of the Rarebit Fiend>에서 이미 칸을 부수고 넘어서거나 드로잉하는 작가를 드러내며 자기 반영적 작업을 진행한 바 있다. 게다가 자기 반영적 인식은 이후 <Little Nemo>의 카니발적 유희에 적극 동참하는데, 그 결과 주인공 네모는 보이지 않을 문자를 때어내 삼켜버리거나 혹은 그 자신이 근원적 환상을 상기하는 종이인형으로 변형되어 언캐니한 존재로 복귀한다.     

 


마이브리지의 칸, 간격, 운동

 세기 전환기의 대중은 환상을 체험하기 위해 이전과 같이 민담, 전설 등의 고전적 환상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신 ‘화이트 시티’로 상징되는 카니발적 환상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닌데 가령 화이트 시티는 프랭크 바움과 월트 디즈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훗날 오즈의 마법사의 에메랄드 시티와 디즈니랜드의 마술 왕국으로 재탄생한다. 그렇다면 카니발적 환상은 이전의 고전적 환상과 어떤 차이를 가질까. 카니발적 환상은 좀처럼 자연적 이상에 기댄 목가적 풍경을 그려내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적 양식으로 순간과 변화의 우위, 감각적 지각의 팽창, 생활 감정의 역동화를 재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볼 수 있겠다. 윈저 맥케이는 세기 전환기의 환상을 창조하기 위해 이전과 다른 만화 형식을 도입하지 않았을까.


 현대적 매체로서의 검토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작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이브리지의 연속사진은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카메라로 촬영하여 이후 운동에 관한 새로운 관념을 제공한다. 마이브리지의 운동은 광학적 이미지라는 점에서 영화와의 친연성이 강조되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속된 칸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만화와도 깊은 친연성을 가진다. 동시대 만화가들이 여러 근대 매체와 경쟁하는 와중에 마이브리지의 작업에 특별히 기민하게 반응하였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이 기계적 운동이 배우의 연기를 기반으로 성립한 퇴퍼의 운동과는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린다. 특히 마이브리지 형식을 도입한 A. B. 프로스트의 경우 동일한 프레임과 동일한 시간 간격이 연속된 이미지에 특유의 운동과 시간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더 나아가 두 칸 사이의 간격이 어떻게 이미지에 생생한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를 탐구한다.      


<Little Sammy Sneeze>


 마이브리지 형식에서 도출한 칸과 칸 사이의 잠재력. 프로스트의 계승자이자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윈저 맥케이가 간격과 운동에 관한 만화적 혁신을 수행한 지점 역시 이곳이다. 초기작 <Little Sammy Sneeze>를 보자. <Little Sammy Sneeze>는 마이브리지 그리드를 연상하는 6개의 칸으로 구성된 개그만화다. 첫째 칸에서 다섯째 칸까지 재채기하는 주인공의 연속 동작이 재현되며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 칸에서는 그런 주인공이 걷어차이는 행위로 이야기를 끝맺는다. 재채기 운동이 자동기계처럼 실행되는 <Little Sammy Sneeze>는 주류 코믹 스트립이 채택한 마이브리지의 운동에 대한 극단적 패러디로, 주인공의 재채기 시퀀스는 <Harper's Weekly>에서 재채기를 1/4초 간격으로 찍은 81장의 사진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처럼 중단 없는 연속적 운동을 과시하긴 하지만 사실 <Little Sammy Sneeze>는 이에 대항하는 운동 즉 세계의 총체성을 파열시키는 운동을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예컨대 주인공이 재채기를 내뿜는 전후의 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재채기를 하기 직전 일련의 칸은 등간격의 연속적 운동을 전개하지만 재채기를 강하게 뿜어내는 칸에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운동을 발생시킨다. 엄청난 재채기로 사람을 뒤집고 진열대를 날려버리면서 연속적 운동을 무효화시키는 급진적인 간격을 도입한 것이다. 즉 <Little Sammy Sneeze>에는 중단 없는 연속적 운동과 급격한 전환을 예비하는 비약적 운동이 접합되어 있다.


 더욱이 상반된 형식의 두 운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의 영역에서 환상의 영역으로 이동하여 <Little Nemo>에선 경이롭게도 “재봉틀과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결합된다. 처음 <Little Nemo>는 현실에 기원한 네모를 중심으로 통합적이고 중단 없는 연속적 운동을 발생시킨다. 하지만 이내 트릭스터인 광대와 잠의 나라의 배경이 연속적 운동에서 분기되어 급작스러운 비약적 운동을 발생시킨다. “외관상 화해가 불가능한 두 운동이 그 세계와 어울리지 않게 하나의 칸에 공존하는” 에른스트 콜라주의 변주로, 윈저 맥케이는 <Little Nemo>의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이를 분명히 한다. 이 기념비적 에피소드에서는, 검은 경주마가 마이브리지의 궤적을 그리며 질주하고 동시적으로 후경에 자리한 초현실적 배경은 전경의 맥락에 떨어져 나와 자신의 독자적인 시공간을 전개한다.     


<Little nemo>


 1900년 박람회의 기적, 환영적 볼거리

 윈저 맥케이는 간격을 통해 양립할 수 없는 운동을 칸 연속체에 배치하여 환상적 세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카니발적 환상에 불꽃을 일으키기에 충분치가 않다. 그리하여 윈저 맥케이는 마이브리지의 일부 명제를 수정해 칸의 프레임에 운동성을 부여한다.   <Little Nemo>의 운동은 이제 칸 내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까지 확장되어 칸의 프레임을 수직과 수평으로 밀어낸다. 그리고 칸의 연속체는 무수히 변화하는 만화경이 되어 기존 만화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시각 세계를 수립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칸의 운동과 카니발적 환상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수직과 수평으로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는 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이 세계를 변형하는 환상의 힘을 은유하는 걸까. 그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지만 정확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Little Nemo>에서 특권적 위상을 차지하는 시카고 세계 박람회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하자. 그러고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윈저 맥케이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칸을 통해 궁극적으로 재현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계 박람회가 동시대인에게 선사했을 초자극, 감각적 과잉이다. 엄청나게 거대한 건축물을 마주할 때의 경이감이나 아니면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것만 같은 놀이기구를 탈 때의 아찔함 말이다. 당연히 이 같은 현대적 기획은 동시대적 현상으로 예를 들어 조르주 사둘이 “1900년 박람회의 기적”이라고 언급한 파노라마와 디오라마는 <Little Nemo>와 흡사하게 커다란 프레임으로 둘러싸인 화면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관객을 지금 그 안에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최대한 불러일으키도록 조직됐다.


 그러니 <Little Nemo>에서 주인공 네모가 칸과 동기화되어 상승과 하강, 뛰고 매달리기를 반복한 이유는 단지 웃음을 주기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독자 자신이 주인공 네모가 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칸 속에서 취했을 어떤 몸짓에 가깝다. 이 꿈의 세계에는 회전목마의 동물들이 회전 가속도로 하나의 선으로 수렴될 때 칸은 횡적으로 길게 늘여진다. 또한 수직으로 길이를 능숙하게 조절하는 칸들은 열기구와 공중제비의 움직임에 맞춰 리듬감 있는 율동을 선보인다. 멜리에스의 <A Trip To The Moon>을 떠올리게 하는 버섯 숲은 어떠한가. 칸의 집합체는 높이 솟아올랐다 무너지는 버섯의 운동에 참여하다 종국에는 기하하적 패턴으로 현상한다. 게다가 주인공 네모가 페리스 휠의 시선으로 잠의 나라를 조망할 때면 칸은 신문지면 끝에 다다를 정도로 자신을 팽창시켜 광대한 파노라마의 지평선을 펼쳐낸다. 그럼 끝으로 작가 윈저 맥케이의 행방은? 너무 작아 보일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Little Nemo> 무대 어디에선가 그것도 많은 이들의 갈채를 받으며 <Little Nemo>를 드로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Little N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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