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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Feb 05. 2022

윌리엄 호가스를 향한 옹호, 윌리엄 호가스에 관한 흔한



 만화란 무엇일까? 가장 널리 알려진 만화 정의에 따르면, 만화는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이다. ‘연속 언어’로서의 정의는 모든 만화를 누락 없이 한 집합으로 분류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충분조건이 지나치게 넓은 실패한 정의이기도 한데 가령 그림책, 이집트 상형문자, 바이외 테피스트리와 같은 연속언어 모두를 만화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특정 속성으로 정의내리는 기능주의적 시도를 보류하고 대신 미학자 제럴드 레빈슨의 주장을 참조하여 만화의 정의에 역사적 접근을 도입해보자. 제럴드 레빈슨은 예술가들의 의도와 이전 작품들 사이에 형성된 역사적인 관계로 예술을 정의할 수 있다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한 작품과 이전 작품의 관계를 거듭해 올라가다보면 최종적으로는 이전 작품에 기대지 않는 “최초의 예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만화는 기원을 가늠할 수 없는 회화, 조각, 음악과 달리 근대적 형식의 예술이다. 따라서 만화의 “최초 원형체계 집합”을, 만화는 인쇄된 지지대에서 성립한다는 데이비드 쿤즐의 지침에 따르자면, 서구 근대의 어느 지점에서 발견할지 모른다. 최초 원형체계의 집합을 대표하는 작가로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가 빈번히 호명되는 건 그래서다. 이후 세대의 풍자만화가 조지 크루이크섕크 (George Cruikshank)와 토마스 롤랜드슨(Thomas Rowlandson)이 인과적이며 의도적으로 윌리엄 호가스를 가리키며 무엇보다 최초의 만화가로 평가받는 로돌프 퇴퍼의 경우 이론서 <Reflections et menus propos d'un peintre genevois>에서 윌리엄 호가스를 상세히 언급한다. 더욱이 20세기 만화 <Yellow Kid>도 호가스의 <Southwark Fair>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은데, <Yellow Kid>는 거대한 간판, 추락하는 사람, 어지러이 뒤섞인 군중화로 현대판 호가스식 거리를 재현한다.

   

 이렇게 이 글은 윌리엄 호가스를 만화의 선구자로 받아들이지만 그렇다 해서 그것이 기존의 윌리엄 호가스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이들이 연속 판화에 주목하지만 연속언어라는 속성이 정말로 윌리엄 호가스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까. 윌리엄 호가스 이전에도 연속언어는 존재했다. 소설의 형식을 도입한 시공간의 전개는 분명 진일보했지만 그것만으로 윌리엄 호가스의 특권적 지위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 다음의 질문으로 논의를 전개해보자. 만화는 왜 하필 18세기 영국에서 새로이 나타났는가. 만화의 역사적 조건에 관한 검토로서 나는 여기서 구시대와 새 시대가 교차하는 18세기 영국 그러니까 18세기 영국의 ‘양극성’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극성 달리말해 이원론적 구조가 윌리엄 호가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근본 개념이라 주장하려 한다. 예컨대 갈등의 대립항을 조직하는 풍자화 형식이나 전통회화와 통속판화를 중재한 예술적 형식 같은 것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윌리엄 호가스 자신이야말로 양극성을 체현한 모순적 존재였다. 그는 전통회화를 선망하면서 동시에 한없이 경멸했다. 그리고 비망록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도덕적 논설과 부에 대한 욕망이 아무렇지 않게 뒤엉켜 있다. 조화와 중용 혹은 모순과 아이러니, 이원론적 구조가 고양하는 세계의 풍경들. 이것이 연속 판화에서 윌리엄 호가스가 행한 미학적 실천이다.     



18세기 영국 새로운 예술 형식의 탄생

 18세기 영국의 풍자 문학은 동시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양식이다. 18세기 영국은 왕권의 축소, 의회 권한의 확대, 시민계급의 발흥, 상업자본주의 가속화, 세습귀족과 신흥부르주아와의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이 같은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는 영국 풍자문학의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레 호가스의 풍자화가 당대 영문학의 주류인 풍자문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추론해볼 수 있겠다. 이 추론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협소한 그래서 단편적인 진실이기도 하다. 18세기 영국에서는 근대적 만화만 발생했던 게 아니다. 동시에 영국의 근대적 소설(Novel)도 탄생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층 새로운 방식, 즉 어떤 나라나 시대에도 위축되지 않을 현세의 도덕적 주제에 관한 회화 및 판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한 호가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가스의 작품을 풍자문학으로 제한해선 안 되며 이보다 확장된 18세기 근대 소설의 관점에서 조망해야 한다.     

 그러면 18세기 근대 소설과 이전의 소설은 어떤 차이를 가질까? 18세기 영국 소설가 클라라 리브에 따르면 이 시기에 출현한 소설들은 동시대성, 개연성, 근대적 개인, 일상적 언어와 서술 방식, 사실적이고 충실적인 묘사라는 다섯 가지 특성을 공유한다. 게다가 이 새로운 문학적 형식은 근대 계몽주의적 기획의 일환으로 시민 사회의 새로운 공적 귄위를 창출하려 했는데 윌리엄 호가스가 ‘현세의 도덕적 주제화’를 주창한 것도, 18세기 영국 소설의 대중적 주제 ‘귀족과 중산계급의 결혼’이 <Marriage a la mode> 연작으로 재현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윌리엄 호가스와 영국 소설의 아버지 ‘헨리 필딩(Henry Fielding)’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는 호가스의 미학에서 반드시 짚어야할 핵심적인 사항이다. 헨리 필딩은 새로운 소설의 흐름에 참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시대 형식적 사실주의(formal realism)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작가다. 그는 시와 산문, 서사시와 희극, 보편성과 특수성 등 대립적이고 이원론적인 요소들의 갈등과 모순 속에 놓여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신고전주의 전통과 새로운 사실주의 경향 속에서 균형과 중도를 유지하여 이질적인 요소들을 종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필딩은 결국 자신 속에서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갈등과 모순 속에서 영국적 철학 정통인 경험주의에 의지해 “균형과 견제”의 방식을 선택하고자 했다.

 

 필딩의 이 같은 중도적 성향은 본인의 소설이자 호가스 미학의 주요 이론서로 간주되는 <Joseph Andrews>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된다. 헨리 필딩은 <Joseph Andrews>의 서문에서 “희극적 역사 화가(comic history-painter)”와 “캐리커처 화가”(caricatura)를 비교한다.     


 “역사 화가 작품의 참된 우수성은 자연을 철저히 묘사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명석한 눈을 가진 독자는 정상에 벗어난 것 즉 자연의 얼굴을 멋대로 장난친 것이면 무엇이든지 즉각 거부한다. 그러나 캐리커처 화가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 목적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기형적이거나 과장된 것도 묘사할 수 있다. 그림에서 캐리커처 화가는 문학 창작의 벌레스크(burlesque)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희극 작가와 희극 역사 화가는 닯아 있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 방금 희극 작가와 희극 역사 화가는 각각 자신들의 작품을 가지고 캐리커처 화가와 벌레스크 작가만큼 우리가 배를 움켜쥐고 웃게 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극 작가와 희극 역사 화가는 보다 이성적이며 유용한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저 고명하신 화가 호가스를 벌레스크 화가라고 하면 그것은 그분을 매우 모욕하는 일이다.”     


  이로써 호가스가 <Characters and Caricaturas>를 제작한 이유는 명백해진다. <Joseph Andrews>(1742) 서문의 직접적 응답인 <Characters and Caricaturas>(1743)는 그로테스크한 캐리커처를 옹호하는 작품이 아니었다. 기존의 문학 양식과 새로운 사실주의 사이의 대화를 모색해 “산문으로 된 희극 서사시”를 창조한 헨리 필딩처럼, 윌리엄 호가스 또한 희극 역사화가로서 역사 화가와 캐리커처 화가를 중재하려 했던 것이다. 호가스에게 있어 최고의 미적 가치는 양극단에서 중간을 택하는 것으로 그가 주장한 가치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미학적 중용이다. 자신의 저서 <The Analysis of Beauty>를 통해 진정으로 전하고자 했던 주제도 결국 이것이다. 호가스는 뱀 같이 구불구불한 선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음에도 기대와 다르게 미의 여섯 가지 원칙 중 ‘적합성(Fitness)’을 가장 우선적으로 내세운다. 구성되지 않는 다양성(variety)은 혼란이며, 과잉된 복잡함(intricacy)은 불쾌에 지나지 않기에 조화가 부재한 구불구불한 선은 결코 이상적인 미의 형식이 될 수 없다 단언하며.     



Characters and Caricaturas(1743)



윌리엄 호가스의 이원론적 형식

 조화를 회복하고 정신을 고양하려는 아리스토렐레스주의자 윌리엄 호가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의문이 든다. 급격한 변혁이 발생한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중용은 과연 시대의 지배적 미학적 실천이 될 수 있는가. 더군다나 탁월함을 지시하는 중용의 행위가 호가스의 풍자적 주제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제 그 동안 외면했던 호가스의 풍자가적인 면모를 진지하게 검토할 때가 됐다. 다름 아닌 부조화로운 두 가지 현상을 긴밀하게 결합하는 아이러니스트 호가스를. 그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 사이의 동요 속에서 중용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미적 세계를 창조한다. 구체적으로 17세기 이탈리아 도덕적 통속판화를 차용한 <A Harlot’s Progress>을 보자. <A Harlot’s Progress>는 통속판화의 추상적 도덕 세계와 이와 대조되는 영국의 구체적 현실 세계를 결합한다. 그러고는 표층 차원의 소란스러운 윤리적 제스처와 별개로 심층차원에서는 복잡한 경로를 동반한 시선을 활용해 작품의 주제 ‘헤라클레스의 선택’을 은밀히 부정한다.


  헤라클레스의 선택은 대립하는 가치(미덕/탐욕) 사이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내용으로, 18세기 영국의 많은 예술가들이 윤리적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꾸준히 사용해 왔던 도상이다. 윌리엄 호가스 역시 <A Harlot’s Progress>에서 이와 같은 미덕과 쾌락의 구도를 도입해 좌측에는 주인공 몰리와 성직자, 가정주부,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를 우측에는 몰리를 유혹하는 포주와 음흉한 눈빛의 난봉꾼을 배치한다. 여기까지는 악행을 비난하고 이를 교화하는 도덕적 논설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A Harlot’s Progress>의 세부를 면밀히 읽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표면적 주장과 실제 진실 사이의 충돌을 발견하게 된다. 탐욕을 상징하는 포주와 난봉꾼은 화려한 의상을 과시하며 주인공의 타락을 확신하는 미소를 짓는 반면, 미덕으로 안내해야 할 목사는 주인공에게 등을 돌리고 심지어 그의 설교를 듣는 나머지 사람들마저 구원을 확신키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린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공정한 중재자는 부재하고 미덕은 쾌락에 한 없이 무력하기만 한데 주인공에게 옳은 선택이 가능한가. 아니 윤리적 선택권이란 애초 주인공에게 존재하기라도 했던 걸까.

 


A Harlot’s Progress, plate1(1732)



 다음으로 아이러니를 동반한 이원론적 구조를 서사의 차원에서 이미지의 차원으로 확산시켜보자. 윌리엄 호가스는 자연의 직접적 관찰을 통해 회화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관찰을 중시하는 호가스의 미학은 경험으로부터 지식을 도출하는 영국 경험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호가스의 경험주의가 로크가 아닌 흄의 경험주의에 보다 가깝다는 사실이다. 흄의 인식론은 강렬하고 생생한 지각인 ‘인상’과 인상에 근거한 정신적 이미지인 ‘관념’을 구분한다. 이를 <The Analysis of Beauty> 표지에 그려진 구불구불한 선과 피라미드의 다면체에 적용해보자. 뱀처럼 구불구불한 선은 의당 흄의 인상에 해당할 게다. 그렇다면 유기적 곡선과 대비되는 기하학적 피라미드는? 호가스에게 있어 본다는 것은 인상의 획득 그 이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눈으로 보는 것은 흄의 주장과 같이 인상에 기초한 관념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호가스는 미술교수법으로 일종의 기억술(mnemonic system)을 제안한다. 이것은 직접 베끼는 대신 마음의 눈에 간직하는 습관을 익혀서 본 것을 기억해내 그리는 방식이다. 언어로서의 예술 개념으로, 미술가는 대상의 언어를 배워야 하며 가능하면 그것들에 통하는 문법을 찾아내야 한다.     



(좌) The Analysis of Beauty, plate 1(1753) , (우) The Analysis of Beauty, plate 2(1753



 결국 구불구불한 선과 기하학적 피라미드는 윌리엄 호가스 작품에 내재한 이원론적 구조(구체와 추상, 특수와 보편, 유기적 선과 기하학적 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호가스는  <The Analysis of Beauty>에서 고대 조각상과 동시대 무도회가 그려진 두 개의 도판으로 미의 이원론 구조를 탐구한 바 있다. 전자의 도판은 상징, 도상 및 알레고리를 의미하는 ‘초월론적 포즈’로, 후자의 도판은 지속적이고 동적인 운동의 순간을 의미하는 ‘움직이지 않는 단면’으로 대비된다. 이처럼 이미지와 기호의 본성 속에서 미학적으로 재현되는 시대의 사유 전략을 포착한 호가스의 사유는 흥미롭다. 하지만 도판의 기호 체계가 더욱 흥미로운 건 그것이 근대 만화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열쇠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호가스 판화는 수많은 세부, 인물, 사건으로 뒤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양립할 수 없는 이원론적 요소가 아이러니하게 결합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 결합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초월론적 포즈와 움직이지 않는 단면이 하나의 이미지에 공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순간은 상호배재적인 두 형식, 서로 대립하는 두 기호를 함께 결합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면서 양가성의 체제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다.

 

 초월적 포즈와 움직이지 않는 단면 사이의 긴장을 형상화한 <Southwark Fair>의 추락 장면을 보자. 이때의 추락하는 배우는 기표와 기의가 고정되지 못한 불안정한 기호다. 운동의 순간으로 실제 추락을 재현하거나 또는 상징으로서 타락에 의한 파멸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두 형식의 중첩으로 다소 기괴하게 살아 움직이는 상징이 된다. 유기적 선과 기하학적 선, 초월론적 포즈와 움직이지 않는 단면을 포괄하는 호가스의 이원론적 체계. 이것은 경쟁자들을 ‘뿌리 뽑기’ 위한 형식적 선택으로, 동시대 유사한 주제와 형식을 공유한 통속판화와 달리 윌리엄 호가스가 문학의 도살장에서 살아남아 만화 정전으로 선택받을 수 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를 역사와 형식을 계보적으로 연계한 트리 다이어그램으로 사유해보자. 윌리엄 호가스가 첫 번째 분기 ‘연속언어/카툰화’에서 두 번째 분기 ‘이원론적 기호/의미체계’로 이행했다 가정한다면, 이 두 번째 분기점은 근대 만화사의 지도를 그리는 데 있어 비교적 적실한 출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최초의 만화가로 평가받는 로돌프 퇴퍼가 두 번째 분기에서 행한 만화적 혁신을 보자. 그는 사실 호가스의 충실한 계승자는 아니다. 뱀 같이 구불구불한 선을 받아들이되 대신 그것을 호가스가 생각하기에 가장 터무니없을 정도까지 밀어붙인다. 극적인 사건 와중에도 놀라울 정도로 견고함을 유지하는 윌리엄 호가스와 달리, 로돌프 퇴퍼는 회화 관습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필치로 세계를 우스꽝스럽고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낸다. 다음으로 크로노포토그래피의 운동 이미지를 도입했던 19세기 만화가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연쇄되는 기계-칸에 일방적으로 종속되길 원치 않았고 두 번째 분기로 돌아가 호가스의 유산을 소환한다. 윌리엄 호가스는 그들에 앞서 도덕적 통속판화라는 엄격한 틀 안에서 모순적인 운동 이미지를 결합하여 새로운 만화적 가능성을 창출한다. 현재 시점의 우리로선 쉽게 인지할 수 없는 그리하여 오해되거나 또는 망각되어져 버린 만화의 역사적 지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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