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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Mar 27. 2022

초현실주의의 만화적 경이, 콜라주 소설

 

 확장된 만화(expended comics) 즉 만화는 아니지만 만화로 읽히는 예술작품이 있다. 가령 <La femme 100 têtes>(1929), <Rêve d'une petite fille qui voulut entrer au carmel>(1930), <Une semaine de bonté >(1934) 와 같은 콜라주 소설들.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 소설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곳에서 만화를 읽어낸다. 이미지와 텍스트, 이미지와 이미지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분명 만화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같은 만화의 외연적 확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보다 더 신랄하게 말하자면 “저급한 것으로 취급 받고 있는 예술형식을 합법화시키려는 욕망”에 기인한 범주 오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술 형식으로서의 만화적 욕망. 어쩌면 누군가는 이 욕망의 기저에 깔린 열등감을 비판할지 모른다. 합당한 지적이라 생각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욕망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제한된 범위 내에 머무느니 차라리 열등감을 인정하고 만화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게 훨씬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의미를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앙드레 브르통’의 주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피카소를 초현실주의 화가로 지목하면서 “만약 초현실주의가 어떤 노선을 스스로에게 부과하기를 고집한다면, 피카소가 이미 지나갔고 여전히 지나가게 될 길로 지나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나는 어떤 표찰이 우리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사람의 작업에 부조리할 정도로 협소한 양상으로 부여되는 것에 항상 반대할 것이다”라고 강조하다. 


 콜라주 소설을 만화 범주에 귀속할 때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있다. 만화의 범주를 확장시키는 데 자족해선 안 되며, 초현실주의 콜라주 소설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이 과연 어떠한 만화적 의미를 가지는지 물어야 한다. 콜라주와 만화의 관계 혹은 콜라주 기법의 만화적 사용성 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 예컨대 이미지를 오려내고 붙이는 콜라주의 일련의 작업은 분절과 연결의 근대적 감각을 선명히 상기시킨다. 세계를 기하학적 형태로 파편화시킨 ‘입체주의’, 순간의 증식을 재현하는 ‘미래주의’, 분해된 운동 이미지 ‘크로노포토그래피’, 모순적 이미지를 축적하고 충돌시키는 ‘몽타주’, 근대적 지각구조의 징후인 ‘정신분산적 수용’처럼 말이다. 게다가 분절과 연결은 필연적으로 지각적인 그리고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간격을 생성하는데 그 중 무의식 세계를 조형화하는 초현실주의 콜라주 사례는 특히 흥미롭다. 초현실주의 콜라주는 사물의 잘린 부분을 다른 요소들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객관적 문맥에서 자유로이 벗어나게 함으로써 간격의 의미론적 잠재성을 경이롭게 비약시킨다. 초현실주의 콜라주 소설을 확장된 만화로 읽고자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칸과 칸, 이미지와 이미지, 이미지와 텍스트의 전통적 관계가 낯설어질 정도로 와해될 때 우리는 만화 형식에 관한 근본적인 검토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콜라주 그러니까 분절, 연결, 간격의 배열에서 어떠한 만화적 가능성이 잠재하는지를.          


문학과 회화의 병치, 콜라주 소설

 콜라주 소설은 글과 콜라주 그림이 결합된 삽화집 형식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학과 회화(글과 그림)의 결합은 콜라주 이전 회화에 국한하자면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막스 에른스트는 어떤 이유에서 기존회화 관습에 반하여 문학과 회화를 결합한 걸까. 그것은 막스 에른스트가 속한 초현실주의가 회화, 산문, 조각, 사진, 영화 등을 포괄하는 집단적 기획이라는 점이다. 초현실주의의 유래를 보자. 초현실주의는 1817년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가 에릭 사티(Eric Satire)가 작곡하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무대 다자인한 장 콕토(Jean Cocteau)의 무용극 <Parade>를 설명하기 위해 창안된 명칭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집단 초상화 <A Friend's Reunion>(1922) 역시 초현실주의의 집단성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시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림속의 초현실주의자들은 실제로 ‘우아한 시체(cadavre exquis)’ 놀이 같이 시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을 상호 교환하는 공동 작업을 빈번히 수행했다. 


 정리하자면 콜라주 소설은 초현실주의 공동 작업에서 파생된 작업으로 에른스트는 이를 통해  외견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현실들을 평면 위에 결합했다. 결국 글과 그림을 결합한 이유도 그리고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업을 수행한 이유도 이질적인 것들의 병치로 초현실주의의 미학을 개시하기 위해서다. 동시대 신문사진과 무성영화와 비교해보면 콜라주 소설이 글과 그림을 결합한 이유는 한층 명확해진다. 표면적으로 보면 콜라주 소설의 글은 신문사진의 설명글이나 무성영화의 자막과 닮아 있다. 하지만 유사한 외양에도 콜라주 소설의 글은 기술복제물의 글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기술복제물과 결합한 글은,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독자에게 이정표를 제시하며 영화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분명하고 강압적 성격을 띤다. 반면 콜라주 소설의 글은 신문, 영화와 달리 좀처럼 그림을 지지하지 않는다. 아니 지지하기는커녕 글 자체의 의미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축제는 나뭇가지에 팔찌처럼 매달려 있다”, “마른 꽃들의 향기 혹은 나는 시바의 여왕이 되고 싶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날씨에도 상관없이, 마술적인 빛”과 같이 낯설고 불투명한 문장들. 이처럼 에른스트는 글을 통하여 그림의 불가피한 모호함을 구제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과 그림의 간격을 가늠할 수 없이 벌려 콜라주 소설의 세계를 낯설고도 생경하게 변화시킨다. 이질적 형식의 병치로 생성된 이 간격은 일종의 무의식의 통로로, 앙드레 브르통의 소설 <L'Amour fou>(1937)에 의하면 대비치 못한 이들이 불현듯 공포에 사로잡히는 곳이자 또한 그러하기에 해석의 섬망이 비로소 시작되는 곳이다.     


Rêve d'une petite fille qui voulut entrer au carmel


분리와 통합의 변증법

 콜라주소설은 문학과 회화의 병치로 콜라주를 만든다. 문학과 회화는 이질적인 조각으로 모방의 대상(순차적 시간과 병렬적 공간)의 측면에서 그렇고 또한 매체의 기호(형상,색체와 분절화된 언어)의 측면에서 그렇다. 더군다나 글과 그림이 각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기호와 이미지를 난립할 때 그것은 마치 콜라주 소설의 표제인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La femme 100 têtes)’을 재현한 것 같다. 하지만 백 개의 머리를 가진 연인이 진정으로 재현되는 곳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지의 파편으로 기괴하게 조립된 콜라주 이미지다. 여기서 우리는 끊임없는 간극 속에서 시선 자체가 분열되는 경험 가령 시각적인 작은 트라우마라는 대가를 치러야 할 시각적 경험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막스 에른스트가 콜라주로 창조한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사디즘으로 각인된 절단된 신체, 세계에 틈입해 전율스러운 느낌을 유발하는 밀랍상,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비인간이 뒤섞여 범주를 교란시키는 괴물들. 그런데 이 콜라주는 기이하다. 이처럼 거듭하여 기이하다고 말하는 건 뒤틀리다 못해 아득해지는 그로테스크한 속성을 재차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로테스크와는 다른 의미에서 정말로 기이한데, 콜라주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틈 또는 이음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다의 한나 회흐(Hannah Höch) 포토몽타주와 비교해보자. <Hannah Höch, Cut with the Kitchen Knife Dada Through the Last Weimar Beer-Belly Cultural Epoch of Germany>(1919)는, 간격이 부재한 콜라주소설과 달리, 오려낸 조각들이 선명한 절단면을 과시하며 세계를 해체시킨다. 

 왜 막스 에른스트는 콜라주를 어렵사리 구축하고서는 자기지명적 증표라 할 이음매를 지워낸 걸까? 사실 에른스트는 콜라주 소설 이전부터 이미 고도로 통합된 구성의 ‘전면 콜라주’에 전념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원본 콜라주가 아닌 복제된 콜라주를 최종본으로 간주했고, 이때의 복제술은 콜라주의 이음매를 은폐시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질료적으로 통합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합성을 추구하는 콜라주 소설은 이후 등장할 팝아트의 콜라주와 겹쳐 볼 수 있겠다. ‘리처드 헤밀턴(Richard Hamilton)’의 콜라주, 일람표 그림(tabular pictures)의 경우 그림처럼 준(準) 환영적인 콜라주 공간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일람표처럼 세계에 존재하는 제품-사람을 계획적으로 모은다. 콜라주 소설 역시 그러하다. 에른스트는 헌책방과 잡지 가판대를 돌아다니며 콜라주 재료로 부르주아 문화의 낡은 이미지 ‘한물간 것(veralter)’을 수집했고 이를 통해 콜라주라 말하지 않는다면 인식하지 못할 만큼 통합적인 콜라주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물간 것은 무엇보다 부르주아 사회가 억압한 과거를 나타내는 목록으로 콜라주 소설의 실내 공간을 괴물과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들끓게 한다.


 우리는 이때 이음매를 감추거나 혹은 지우고자 하는 콜라주 소설의 욕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더욱이 문제는 콜라주 소설의 통합적 욕망이 콜라주의 본질이라 할 분절과 분리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매끄러운 표면이 지어낸 제스처에 불과하다. 콜라주 소설의 통합은 분절과 분리의 부정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의 통합은 분절과 분리의 부정이 아니다. 요컨대 콜라주 소설 더 정확히는 그것의 간격은 분리/통합, 분절/연결의 변증법적 형식이다. 콜라주 소설의 간격은 의미를 단절시키면서 동시에 비약적인 거리로 풍부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생산해 낸다. 그러니 초현실주의자로 변증법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에른스트 역시 이 같은 형식의 고양을 분명 인지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잡지에서 콜라주를 읽어낸 에른스트의 일화로부터 간격의 형식에 기초한 변증법을 읽게 된다. “나는 한 카탈로그 안에서 그토록 서로 다른 모델들이 함께 소개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일견 부조리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나에게 어떤 환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환기된 것들 위로 전혀 새로운 의미들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갑자기 나의 시각적 가능성이 엄청나게 증폭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새로운 바탕 위에서 새로운 대상들이 창조되는 것을 목격했다”.


초현실주의 신비에 대한 해명 

 지금까지 논의에서 초현실주의는 콜라주소설의 일관된 미학체계를 부여하는 경로가 되어주었다. 콜라주 소설이 초현실주의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초현실주의가 이끌어낸 비약적 간격은 이 글의 주요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우린 초현실주의와 잠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초현실주의가 충족되지 않을 간격을 생성했을지라도 어느 지점에선 단호하게 간격 사이에 의미의 가교를 놓아야 할 것이고 따라서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 무의식적 수사를 명료하게 해명해야 한다. 설사 이러한 시도가 초현실주의에 반하는 자의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La femme 100 têtes>을 경유해 분리, 통합, 간격에 관한 콜라주 소설의 의미체계를 검토해보자. <La femme 100 têtes>는 만화와 주요 속성(연속언어, 글과 그림의 결합)을 공유하지만 그것의 양상은 분열적이다. 그림과 그림의 연결은 시공간적 연속성을 갖지 않으며 글과 그림의 결합 또한 상호파괴적이다. 예컨대 “운송과 상처의 매력은 세탁물을 끊이면서 조용하게 증가하게 된다”와 “금속성의 머리를 가진 매력적인 작은 벌레를 볼 수 있는 곳”처럼 글은 그림의 의미를 중재하기보다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것은 통합적인 상태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삶의 욕동이 아닌 연결을 끊어 파괴하는 죽음의 욕동에 사로잡힌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콜라주 소설의 글이 설사 낯설고 모호할지라도 종국에는 인식의 지도로서 그림의 의미를 “정박”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있을 수도 있던 처녀 수태> 도판은 그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침대 위의 여성, 그림자로 얼굴이 지워진 남성, 비현실적인 크기의 병, 울부짖는 천사의 상. 양립할 수 없으리만큼 이질적인 인물과 사물로 구성된 이 그림에서 의미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서사적 기대를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그 기대, 그 기다림은 쉬이 실현되지 않을 게다. 다만 그림과 관계한 글이 최소한의 맥락을 제공할 때 그러니까 실패한 수태고지의 계시를 전할 때, 그림의 의미는 일시적으로나마 고정 된다. 그러면 <그리고 이들은 텅빈 거인들의 길에서 마구 펼쳐진 마른 쿠키를 줍는다. 이것은 요람을 쌓아놓는 것이다> 도판의 사례는 어떠한가. 여기서도 글과 그림의 관계는 불투명하다. 그림 내 어디서도 ‘거인’, ‘쿠키’, ‘요람’이 지시해야 할 대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불안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글과 그림이 이렇게 서로를 무효화하는 상황에서조차도 우리의 의식은 텅 빈 간격 즉 의미의 공백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다. 의미적 무게가 결여된 단어에 의지해서라도 서사적 의식을 기어코 작동시킨다. 그 결과 무의식의 배경인 거인의 세계가 표면으로 떠오르고 흩뿌려진 조각들 역시 부단한 기호작용으로 쿠키 그리고 요람으로 전치된다.      


La femme 100 têtes


 이와 같이 콜라주 소설의 글은 그림의 의미를 규정한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되는 건 콜라주 소설은 이름에서 명시적으로 가리키듯 ‘소설’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콜라주 소설이 연속된 사건 즉 연속된 그림으로 구성된 서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콜라주의 글은 개개의 그림의 의미를 지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나열된 그림으로까지 통합적 의미를 부여한다. <풍경이 세 번 바뀐다> 연작을 보자. 파편화된 3개의 그림은 시간의 인과적 관계가 함축된 ‘바뀐다’라는 동사가 덧붙여지면서 한층 높은 수준의 통일성을 획득한다. 더욱이 콜라주 소설의 글은 자신이 구축한 선형적 시간을 와해시켜 그림 전체 층위를 아우르는 순환론적 시간을 창조하기도 하는데, 가령 시작과 끝이 동일하게 반복되는 <La femme 100 têtes>은 “끝 그리고 계속”의 구절이 존재론적인 개입을 할 때 창조와 순환, 파괴와 혼란이 되풀이 되는 영원회귀의 세계를 배태한다. 

 

 물론 서사를 누적시키는 글의 역량을 일방적으로 특권화 할 필요는 없다. 글의 도움 없이 연속된 그림의 역량만으로도 서사를 전개시키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연속된 그림을 대면 할 때면 거의 자동적으로 빈 간격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는다. 연속언어의 근본적인 독해 원리로 설사 방향상실의 감각에 매혹된 콜라주 소설이라더라도 그렇다. 비약적인 간격 속에서도, 방황하는 시선 속에서도 어떤 의미를 구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La femme 100 têtes>의 중심 모티브인 여성 누드 형상은 의미론적 통합을 수행하는데 있어 긴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차라리 징후적이다. 이질적인 흰 파편의 형태는 억압된 것의 귀환 마냥 환영성을 강조하는 통합적 구성과 전면적으로 대립한다. <La femme 100 têtes>의 기원이 다름 아닌 콜라주임을 상기시키며. 그래서일까. 백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으로 지시될 이 형상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직접적인 연속성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종합적인 관점에서 그림과의 관계를 응집한다. 흰 파편의 형상은 연속적인 소설적 서사 양식과는 다른 병치적인 콜라주적 서사 양식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소설적 서사양식의 선형적 구조를 따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이며 독자가 원한다면 흰 파편의 형상에 의지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거나 또는 건너뛸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백개의 머리를 가진 연인>은 우리의 의식 내에서 자르고 합치기를 거듭하며 콜라주적 서사 양식으로 탈바꿈한다.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 소설은 이처럼 서사의 효율적 전달을 목적으로 연속성과 통합성을 강조하는 “만화적 양식의 영도(零度)”를 파열시킨다. 그러고는 콜라주 소설의 억압된 무의식이라 해도 좋을 분절적 속성을 복귀시키다. 생각해보면 콜라주가 중심 주제이긴 했지만 이 글은 처음부터 만화에 관한 글이었다. 칸/페이지, 글/그림, 캐릭터/배경이라는 만화의 이중적 층위는 콜라주의 구성 체계와 상응한다. 게다가 평론가 김주하의 사려 깊은 지적처럼, 만화와 콜라주는 상동(homology)적 형식으로 두 형식 모두 분절, 불연속, 모듈화, 평면성을 공유한다. 그러면 콜라주 소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콜라주 소설이 만화 범주에 속하는지의 유무는 실제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정말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콜라주적 상상력이라고. 기호와 이미지로 파편화된 콜라주의 평면에서 만화의 조건을 검토하고, 만화의 잠재된 미학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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