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정기검진을 하기 위해서 심장전문의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이 곳 프랑스의 의료 시스템은 한국과는 많이 다른데, 일반의든 전문의든 의사 개개인이 캐비네(Cabinet)라고 부르는 자신만의 사무실에서 환자를 맞이한다. 간호사나 보조원은 없다.
의사 가족이 그 집에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필요한 부엌 같은 공간을 개조하긴 했지만, 원래가 일반 아파트라서 대기실인 쌀-다땅뜨(Salle d’attente)에 앉아있으면 병원이라기보다는 누구네 집 거실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긴장감 없이 편안하고 좋다.
낯선 땅에 적응하느라 지지리도 고생한 결과로서, 나는 일반의인 내 주치의를 비롯해서 각종 전문의 및 대체의학까지 포함한 파리 최고의 의사목록을 가지고 있다. 내 심장전문의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시다.
이 분을 알게 된 것은 약 3년 전쯤이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그 분의 잘 차려입은 양복이었다. 캐비네에서 진료를 보시는 의사선생님들이 하얀 가운을 입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클리닉이나 병원에서 수술이나 시술을 할 때에는 당연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 입으시지만 보통 진료 시에는 일반 옷을 입으신다.
나를 진료실로 안내하신 후, 질의상담 및 심전도, 심장초음파 등을 함께 진행하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 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구김하나 없이 완벽한 새하얀 와이셔츠, 교과서처럼 반듯하게 매어진 약간 폭이 넓은 넥타이와 살짝 체크무늬가 들어간 양복은 그야말로 ‘트헝떼앙 (Trente-et-un)’이 따로 없었다.
Trente-et-un: 숫자로 31을 나타내는데, 프랑스에서 ‘트헝떼앙’이라고 하면 자신이 가진 옷 중에서 최고의 옷을 말한다. 이는 12월 31일에 파티를 하러 갈 때 최고로 차려입는 것으로부터 유래한 표현이다.
그 분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단지 깔끔한 의상만이 아니었다. 사실 위에서 묘사한 대로 빈틈없는 옷차림만 상상하다보면, 그분이 굉장히 깐깐해 보일 것 같은 느낌도 들 것이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약간 동글동글한 덩치에 인자한 표정,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악수로 마주잡는 손의 따뜻함까지 마냥 포근하시다.
첫 진료 때부터 나는 그 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없는 집중으로 귀 기울여 주셨고, 내가 하는 질문에 몇 번이라도 자세히 그러나 쉽게 설명을 해 주셨다. 겉표지에 내 이름을 적고 새하얀 A4 용지를 몇 장 끼워 만든 서류철 안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내 이력과 증상, 검사결과 등을 적어나가셨다. 주치의의 추천서, 다른 곳에서 했던 검사서류 등을 하나씩 빠짐없이 복사하고 철에 끼우시고 지긋이 들여다보시며 생각에 잠기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의사의 정석이 아닐까 싶었다.
그 분이 혈압을 재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숭엄하다. 내가 진료대에 누워 5분정도 휴식을 취하면, 그분은 내 손목을 끌어다가 당신의 겨드랑이로 고정을 하신 후 정성스럽게 팔에 혈압계를 끼우신다. 꼼꼼하게 벨트를 채우고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공기를 불어넣은 후, 청진기에 온 감각기관을 기울여 내 심장소리를 들으신다. 그렇게 5분 간격으로 두 번을 재고, 다시 앉아서 정확도 좋은 손목 혈압계를 이용하여 두세 번 더 측정치를 다시 확인하신다.
이런 모든 분위기와 진료에 임하시는 모습 하나하나는 그 분이 얼마나 그 분의 일에 정성을 쏟고 완벽을 기하는지를 저절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분께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의식적인 노력 없이 그 분에 대한 완벽한 믿음이 자리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신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이런 진료는 매번 한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그 분은 한시간 동안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시는 것이다. 그야말로 신뢰가 안 생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분을 처음 뵙던 날 너무도 완벽했던 옷차림을 보고 나는 그분이 그 날 중요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분의 정성스러운 진료는 내 첫 진료여서 더 부각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그 이후 일 년 반 동안 그 분을 여러 번 뵙고 진료를 받는 동안, 그분은 단 한 번도 그 첫날의 모습에서 달라진 적이 없었다. 매번 나는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이제 감동이 되었다.
매 순간을 ‘트헝떼앙’을 차려입은 최고의 모습으로 당신 앞에 마주앉은 단 한사람에게 모든 귀 기울임과 정성을 내어주시는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내 일을, 그리고 내 삶을 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조심스럽게 나도 그분의 하루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을 향한 다정한 시선을 씁니다.
- 파리제라늄_최서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