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으러 가자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그날 나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이 화끈거리게 화가 치밀어 오르더니, 흥분이 정점을 지나자 우울해졌다.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나는 연구실을 뛰쳐나와 친구를 찾아가고 있었다.
여자 화장실조차 달랑 두 모퉁이에만 설치되어 있던 ㅁ자 모양의 공대 건물, 유일했던 여자 동기의 연구실은 중정원 건너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었다. 혹시나 실험 때문에 바쁘려나? 수업이 있던가? 아님 데이트를 하러 나갔을까?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큰 기대 없이 타박타박 세라믹 실험실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숙향이는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지도교수님께서 바로 옆방에 계셔서 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젖은 휴지처럼 뭉개진 나를 그냥 모른 척할 리가 없는 숙향이였다. 나와는 달리 항상 차분한 숙향이가 아무 말 없이 축 쳐진 내 어깨 위로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하소연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릴 참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뜬금없이 그녀가 물어왔다.
점심은 먹었어?
아니…
이런~ 배고프니까 우울하지~.
나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그러고 보니 오후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숙향이는 뭉개진 나를 데리고 밥을 먹이러 나섰다. 늦은 시간이라 구내식당은 이미 끝나서 한참을 걸어 교정 바깥까지 나가야만 했다. 이미 점심을 먹었던 그녀는 내가 밥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아무것도 캐묻지 않은 채, 그저 맞은편에 앉아 꾸역꾸역 숟가락질을 하는 나를 다정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를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한 이유에 대해 핏발을 올리면서 토해낸 것도 아니고, 내가 옳았다고 아님 속상할 만하다고 든든한 지원 사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었다. 하늘이 온통 먹물 같았던 기분이 밥을 먹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평온해지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나니 심지어 왜 우울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해서는 나 진짜 배고파서 우울했던 거 아닌지 착각할 뻔했다. 문득 ‘웰컴 투 동막골’ 촌장님 리더십의 비결, 바로 ‘잘 맥이는 것!’이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그 대사, 웃자고 한 농담이 아니었나 보다.
배고픔이 사람이나 동물을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때로 난폭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혹은 영양학적으로 분명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날 내게 치유와 위로가 되었던 것은 다 먹어치운 비빔밥 때문만은 아니었다. 쭉정이 같던 나를 밥상 앞에 앉혀두고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마지막 숟가락까지 지켜봐 주던 내 친구 숙향이, 지금도 우울해지는 날이면 그녀의 한마디가 심장에 따뜻한 온기를 피어 올린다.
배고프니까 우울하지, 밥 먹으러 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면 내 영혼은 금세 배가 부르면서 다시 기운이 난다. 그래서일까? 내 곁의 누군가가 우울해 보일 때면 일단 끌고 가서 뭘 먹이고 본다. 숙향이에게 배운 다정 가득한 밥상의 위로, 그것은 언제나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