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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페옹 Sep 23. 2018

술 먹고 그런건데 뭘~

이해 받는다는 것

내년 4월에 열릴 파리마라톤 참가신청 공지가 떴다. 마라톤은 좀 그렇고, 3월에 있을 파리 하프마라톤에 등록을 할까 심각하게 망설이는 중이다. 나는 자칭 우리 회사 마라토너들의 서포터즈라고 부를 만큼 마라톤에 애정이 있다. 실제로 동료들과 함께 파리 하프마라톤을 완주한 적도 있다. 


마라톤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예정이라는 J선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나와 인연이 깊은 이 선배는 대학시절 내내 활동을 했던 합창단 선배이면서 대학원 동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말 멋.진.사.나.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이 그다지 일반적이지 않았었다. 물리학 전공이던 나는 재료공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방법을 찾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재료공학과에 다니고 있던 J선배가 용기를 주었었다. 


덕분에 나는 물리학 전공에 재료공학 부전공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마침내 그 선배와 같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 용기를 주었다고 멋진 사나이라는 것은 아니고, 내 마음에 그 선배가 정말로 멋진 사나이로 남은 것은 조금은 색다른 이유 때문이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대학원은 석·박사과정 합해서 총 40여명 정도 되었었는데, 그 중 여학생은 나와 학·연 협력과정으로 연구소에 다니며 수업을 들으러 오던 내 친구, 이렇게 달랑 둘뿐이었다. 그 날 우리 모두는 정말 이리저리 뛰고 달리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고, 저녁 회식을 위해 삼겹살집에 모여 앉았다. 우리학과 교수님 7분과 40여명의 학생들 모두 함께 많이 웃고, 많이 먹고, 많이 마셨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사실 나는 술을 꽤 잘 마시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부분 술자리 덕분에 즐거운 일이 많았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 중에서 가장 술 마실 일이 많았고, 또 잘 마셨던 시절이 바로 이 대학원 시절이었다. 풀타임 과정으로서는 홍일점이었던 나를 잘 챙겨주시던(특히 술 마실때!) 선배님들 덕분에, 주량 한번 제대로 늘려놨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체육대회가 있던 날, 내가 마신 소주가 그러니까...... 7분의 교수님들과 두 번씩은 ‘짠!’을 했고, 모든 동기 및 선후배들과 한 바퀴를 돌았으니까 40여잔...... 그러니까 대충 다 합하면? 아! 말하기 겁난다. 오늘 이렇게 정량적으로 계산을 하고보니까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셨잖아!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날 필름이 끊기고 말았다. 필름이 끊긴 것은 그 날이 내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국의 흔한 회식...가끔 그립기도... @Pixabay


광란(?)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고, 다음 날 정오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선배님들을 만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분위기가 약간 서먹서먹했다. 그래도 다들 별다른 얘기가 없었고 나는 그냥 평소처럼 아무 일 없었던 듯 얘기도 하고 밥도 먹었다. 시간을 그렇게 흘러갔고 그로부터 며칠 뒤, 약간 어색했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고 우리는 또 밤낮 없는 일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로 그제서야, 나는 그날 밤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체육대회 회식을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내가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얘기였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랬는지 맹새코 모르겠는데, 내가 대로 한가운데서 J선배의 뺨을 때렸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짝’ 소리가 나도록 엄청나게 세게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냐! 아무튼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지금 모르는 것처럼 그때도 까마득히 몰랐었지만 (어쩜 그렇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지), 어떤 이유로든 그런 실수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정말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그 날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게다가 며칠 동안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냈던 것도 너무 창피해서, 정말 딱 하늘로 날아가든 땅 속으로 꺼지든 어디로든 사라져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선배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왜 다들 진작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것인가 원망스러웠다. 그랬으면 지난 며칠 동안의 무례함까지 더하지는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Pixabay


너무 충격을 받은 나는 그 길로 J선배에게 달려갔다.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였다. 석고대죄 하는 기분으로 J선배 앞에 섰다. 그리고 정말정말 죄송하다고 사죄를 드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고, 이제서야 얘기를 듣고 달려오는 길이라고. 그렇게 사정없이 복잡한 심정으로 참회하는 이 어린 양 앞에 선배가 말했다.


“괜찮아. 무슨 사과를 해... 제 정신이었으면 가만 안 뒀겠지만, 술 먹고 그런 건데 뭘~ ”


“......”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던 J선배의 덤덤한 표정을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감동하고 감사할거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선배 나이 겨우 스물다섯 살. 아무리 군대를 다녀왔다 하더라도 정말 어린 나이가 아닌가! 보통의 아량으로는 그런 포용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J선배를 생각할 때마다 그 점에 늘 감탄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후배들에게 과연 나는 그런 선배였던가? 아니 그런 선배가 될 수 있을까? 후배의 실수를 그렇게 따뜻하게 용서해 주고 감싸줄 수 있을까? 


선배님께 보내는 감사의 마음@Pixabay


문득 학교 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생활도 벌써 20년을 넘기는 나, 과연 후배들을 잘 도와주고 이끌어주고 있는가? 후배들에게 본받을 만한 선배인가? 아! 얼굴이 벌게지고 뒤통수가 따가워지려고 한다.


그날 이후, 나는 두번 다시 필름이 끊기도록 술을 마신 적이 없다. 가까운 사람들과 한두 잔 기분 좋게 마시는 것 외에는 나의 잠재적인 실수가 두려워서 과음을 경계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마치 통제할 수 없는 헐크로 변하기라도 하는 것 같지만, 이 날의 흑역사를 돌아보자니 아니라고 말 못하겠다.


큰 실수 앞에서 이토록 깊은 이해와 사랑을 받아본 일은 정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내내 잊고 살다가 얼마 전 한국에 갔을 때 J선배를 다시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 날의 일을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로 써내려가면서, 나는 내가 받은 깊은 이해와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이미 20년전에 때려버린 선배의 뺨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그것이 내가 J선배에게 드릴 수 있는 보답이 되리라 믿는다.


선배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 날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배님 같은 분을 만난 것은 제 인생의 행운입니다.

보스턴 마라톤 멋진 완주 꼭 기원하겠습니다. *^^*



멋진 선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최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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