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너와 나의 젊음
동생 집에 들렀다. 작가인 동생의 집에는 늘 새로운 책들이 잔뜩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신간들, 업계 동료들이 보내온 자신의 출간작들, 그리고도 또 스스로 골라 사들인 책들. 취향 좋은 작은 서점에 들른 기분이다.
“언니 이 작가 알아?”
책 하나를 가리켰다.
<연수> 장류진
“몰라. 소설이야?”
“응, 회사 다니면서 글을 쓰다가 지금은 전업작가가 된 분인데. 몇 년 전에 나온 책이 엄청 핫했어.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고.”
“그건 알랭 드 보통 책 아닌가?”
동생이 서재에서 찾아들고 나온 책 제목은 정말 <일의 기쁨과 슬픔>이었다.
허허, 그 유명한 책의 제목을 그대로 따라 썼다. 처음 든 생각은 ‘그래도 되는 건가?’였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쳤다.
첫 번째 이야기에 ‘빛나’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진짜 이런 사람 꼭 있는데 싶은 그런 인물이다. 머릿속으로 덧셈 뺄셈을 하는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그 안에서 일어나는 너무 사소하고 치사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말하기도 뭐 한, 하지만 닥치면 내내 신경이 거슬릴 수밖에 없는 일들. 절친에게만 “내가 이상한 거야? 내가 나쁜 거야?” 식의 동의를 구하게 만드는 사건들. 나쁜 사람은 아닌데 어딘가 이상하게 핀트가 나가있어서 쓸데없는 신경을 쓰게 만드는 그런 사람. 차라리 나쁜 사람이라면 대놓고 열폭이라도 할 텐데 사적으로 알았다면 실은 좋은 사람 쪽에 가까워서 대놓고 욕하기도 미안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 내가 알던 ‘빛나 언니’들이 주르륵 스쳐 지나간다. 빛나 언니들을 향해 발동했던 나의 뾰로통한 감정들도.
두 번째 이야기 <일의 기쁨과 슬픔>
언젠가부터 실리콘밸리를 숭배하며 우리나라 기업에 유행처럼 번진 영어이름 쓰기, 직함 부르지 않기, 에자일, 스쿼드, 커피챗 등등. 그러나 여전히 상사에게는 존댓말을 쓰고 직원에게는 반말을 섞어 쓰고 계약서보다 정과 믿음으로 미래를 약속하는 K 기업 문화. 덩치 차이가 너무 나는 두 사람이 절뚝거리며 애쓰는 2인 3각 경기를 보는 기분이랄까. 참 애쓴다, 응원하자 싶으면서도 자꾸 새어 나오는 읭? 스런 포인트들에 쓴웃음이 비어져나온다.
그 와중에 또 우리를 몹시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군상들. 왜 저래, 싶은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
알고 보면 하나하나 눈물 나게 치열하다. 자기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피 흘리며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고 있는 존재들이여. 내 십자가 하나를 짊어지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꺾일 듯 힘겨워 주변의 누구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이 고단한 젊음이여. 그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펴보고 생각하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되살려낸 작가의 다정한 시선이 위로가 된다. 누군가 한 명쯤은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기억해주고 있다. 애쓰고 있는 거 안다고. 나만큼 당신도 참 고생이 많다고.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일터에서의 인간 군상과 에피소드들을 정갈하고 속도감 있게 그려낸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빠져 책장이 휘릭 휘릭 잘 넘어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를 만났다. 로맨스인가! 젊은 남녀로 가득한 회사라는 공간에서 몽글몽글한 호르몬의 기류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갑작스러운 설렘이 도파민을 쏟아내는 순간, 무표정했던 그들의 머릿속에는 저마다의 상상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치열했던 사무실은 일순간 다른 온도를 갖는다.
왜 남자와 여자는 이토록 다른 것일까. 수많은 착각과 오해가 어떤 둘을 이어지게도 하고 헤어지게도 한다. 능수능란한 세련된 30대 남녀의 썸은 결국 마땅한 어떤 지점에 이른다. 지독한 현실고증. 이 작가, 장류진, 정말 매력적이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이 여러 번, 진부한 연애 예능보다 훨씬 매운맛이라 낄낄 즐겁다.
<다소 낮음>
주위에 이런저런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 중에도 둘이나 있다. 그들의 행보는 때로 답답하다. 왜 저기서 멈출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를까 하는 심정이다. 갓생, 미라클모닝, 파이어, 영 앤 리치. 생산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밀도 높은 삶의 방식을 추앙하는 시대에 저렇게 느리고 굼떠서야. 지금 이 기회를 붙잡아 어서 비주류를 벗어나 주류에 올라설 타이밍을 왜 자꾸 놓치는 것인지 답답했다. 이제는 안다. 그들은 주류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자신의 효율만큼 해내는 것뿐이다. 더 원하는 것이 있다 해도 그럴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이 아티스트다.
<템페레 공항>
여행에서 만났던 고마웠던 사람들. 그들에게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못한 호의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꼭 편지를 써야지, 찾아가 봐야지, 인사를 전해야지.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지나는 동안 미뤄둔 마음은 어느새 짐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검사하지 않는 숙제는 내 마음에만 죄책감이 되었고 어느 순간 차라리 잊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도무지 잊히지 않는 그 마음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책상 서랍 저 안쪽에서, 블로그에 써둔 오래된 일기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때마다 다시 서랍을 쾅 닫기도 하고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같았다. 어리고 무모하고 대책 없던 그 시절의 나. 무언가 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있던 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나를 자꾸 떠오르게 하는 것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눈물까지 핑 돌게 만든 이야기꾼 장류진.
‘좋아하는 작가’에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마음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다.
이제 겨우 그의 책을 한 권 읽었을 뿐이라는 것 또한.
그녀가 앞으로 써낼 이야기가 어떤 것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다음 작품을 읽어나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