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십자가를 진 종현과 함께 하기 위하여
샤이니의 메인보컬 종현이 떠난 지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계절은 봄을 시샘하는 차가운 눈바람이 불고 있다. 그가 떠난 날도 그랬던 것 같다. 유난히 춥고 어두운 그 날. 그가 떠나고 나는 꽤 오랜 시간 패닉 상태였다. 지금의 눈바람은 봄을 위한 과정이지만, 춥고 추운 계절 속으로 사라진 그는 여전히 마음속에 멍으로 남아있다. 맹세컨데 나는 그의 팬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절절한 음성의 노래들은 죽음 후에서야 알게 되어 눈물을 끅끅 흘리며 들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그를 기리면서. 아니, 이 시대의 우울을 안고 저 세상으로 간 그가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친구들 같아서.
그의 유서를 읽고 또 읽었다. 속부터 자신을 갉아먹어 도저히 그런 결정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는 내용. 그의 죽음이 내 안의 파장을 몰고 온 것은 다른 이유도 아닌 바로 그 점이었다. 속부터 시작한 자기혐오와 깊은 우울. 그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다. 길을 걷다 눈물을 흘리고 슬픔을 견뎌내는 청춘이 도처에 널렸다. 그 슬픔 끝에 죽음은 하나의 방법이 되었고, 누군가는 쉽게 허무주의의 삶을 살아간다. 내가 존경하는 작가 유시민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이들은 모두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고 했다. 굴곡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올림픽까지 두 번이나 개최한 현재의 젊은 이들이 지닌 십자가는 비교적 가벼워 보일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독재자가 선량한 시민을 살해하는 시기를 살고 있지 않다. 민족끼리 총을 겨누며 하루하루 굶주림에 배를 곯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우리의 십자가가 깊은 우울과 슬픔인 것이다. 우리가 지고 있는 십자가의 무게는 너무 무겁다.
최근 정부에서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자살예방 행동계획을 마련했다. 무려 14년째 이어온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 정부는 이를 통해 현재 인구 10만 명당 25.6명인 자살률을 2022년까지 17명으로 낮춘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계획은 꽤나 상세하다. 자살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빈곤, 실패, 고립, 질병으로 뽑았으며 4단계로 자살의 과정을 감시하고 예방하고자 하는 예방이 핵심 내용이다.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국가의 정책으로서 이 시대의 십자가를 해결할 시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 자살예방 행동계획 중 나의 눈에 뜨는 것은 "유명인 자살사건 대응체계 구축"이다. 맞다. 유명인의 자살사건은 사회에 큰 파동을 몰고 오길 마련이다. '베르테르 효과'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의 의상이 실제 사회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극단적인 자살 방법을 모방하는 것을 지칭하는 사회심리 용어다. 이번 자살예방 행동계획에서도 방송법을 개정하여 자극적인 유명인의 자살방법에 대해 규제하는 방안을 어김없이 언급한다. 2차적인 심리적 동요와 우울을 막겠다는 지침은 분명히 지켜져야 할 부분이다. 종현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게 자세하게 그의 죽음을 묘사하며 우울증의 징조들을 추측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방법은 물론이고 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과 마지막 sns 모습도 슬픔의 과정으로 소비한다. 그의 빈소를 찾는 스타들의 모습을 찰나로 찍어 나르고 생전 그의 모습에서 죽음의 흔적을 샅샅이 찾아낸다.
그것은 단지 매스컴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이들은 눈물과 우울로 세상을 보내며 그의 죽음을 낱낱이 파악하려 한다. 때로는 그의 측근들의 눈물을 안타깝게 소비하면서 말이다.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듯, 사람들은 슬픔을 소비한다. 그 반복적인 슬픔 끝에 그의 우울은 모두의 우울이 되어 '종현'은 사라졌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는... 정말 숱한 죽음에 사라졌을까. 오늘의 포스팅을 위해 웹서핑을 하다 매일매일 그에게 편지를 띄우는 팬들을 발견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슬픔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죽음 이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팬들이야말로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의 선택마저 사랑한다. 너무 아파 죽음을 선택한 그의 슬픔까지 껴안으면서.
아뿔싸. 그제야 나는 나의 과오를 알아차렸다. 나는 그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글을 쓰려고 했으면서, 그의 죽음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초월한 듯한 위선을 보였던 것이다. 세상이 그의 죽음을 이슈를 위해 소비하고만 있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종현'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오명을 벗기 위해 14년간 지속된 자살률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내는 것에 가려진 한 명 한 명의 누군가를 나는 바라본다. 그는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꿈꿨을 것이다. 풍부한 작품을 남긴 종현의 유작들을 들으며 다시 그를 이해하려 한다. 그는 죽음만을 위해 내달린 사람이 아니다. 그 역시 꿈을 꾸고 사랑을 했던 청년이며, 그런 빛나던 그를 사랑하던 이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한병철 작가의 <피로사회>에서는 성과위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분노할 힘도 없는 우울의 시대라 표현했다. 분노하기도 전에 지치는 사회. 속으로부터 시작된 열은 식지 않고 자신을 다그쳐 끝을 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 하지만 베르테르도 한 남성이었다. 종현도 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 종현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안기 위해 위로의 곡을 쓰며 세상을 견뎌내 보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끝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같은 슬픔을 잊기 위해 누군가의 이름을, 슬픔을, 젊음을 기억해야 한다. 종현의 십자가는 그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끝으로 그의 십자가를 조금 덜려고 한다. 그 십자가는 남은 이들이 지고 있다. 종현을 떠나보낸 이와, 오명이라 일컫어진 슬픈 끝으로 세상을 뜬 이들을 보내야만 했던 사람들. 그들의 십자가를 우리는 함께 지어야 한다. 끊임없이 이 우울하고 피로한 사회가 세상 끝으로 우리를 내몰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