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나를 움직인 문장과 대사

시리즈를 시작하며 (하)

by 포레스트 하이

신무협의 태동 - 무림동 시절


“무협소설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무협소설이 달라졌다는, 신무협의 등장 기류에 시장은 격하게 반응했고, 떠났던 독자들도 하나둘 복귀했다. 젊은 층이 새로운 독자층을 형성하게 된다. 그 첫번째 공신으로 컴퓨터의 보급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하이텔 통신망에 ‘무림동(武林洞)’ 공간이 만들어졌고, 무협 공모전도 열렸다. 수많은 걸출한 신진 무협 작가들이 배출되었는데, 중편 <칠석야(七夕夜)>로 당선된 이재일 작가가 대표적이다. 글을 쓸 수 있는 판이 마련되자 컴퓨터 속에서 잠자고 있던 재야 고수들의 작품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다. 책의 판형도 바뀌었고, 종이의 질도 누런 갱지를 버렸고, 식자도 세로에서 가로로 달라졌다. 때마침 도서대여점이 새로운 산업으로 부상했고, 반지하에서 머물던 만화대본소가 양지로 서식지를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흐름은 2010년 즈음하여 스마트폰이 대세로 등장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영웅문>으로 촉발된 무협소설 선풍은 젊은 독자층으로 대변되는 대학가도 강타했다. 사진의 신문기사에서 보듯 어느 대학도서관의 대출 순위 10위 중 <동방불패>, <장백산맥>, <불야성> 등 다섯 편이 목록에 올랐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협 칼럼니스트 김요석 님의 표현을 인용해 본다.


신무협은 80년대 무협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조어이지요. 그 시작은 하이텔 무림동에서였습니다. 이후 90년대 신인 작가들의 실험적이면서 퀄리티를 유지한 작품을 우리는 신무협이라 부르게 됩니다. 새로운 무협 장르가 등장한 것이지요. (......) 무엇보다도 공모전도 하고 새로운 작가들이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좌백, 용대운, 이재일, 이우형, 임준욱 등 거장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클리셰에서 키치로!


신무협의 특징은 기정(奇情) 무협소설의 클리셰(cliché, 판박이 표현)를 과감히 벗어던진데 있다. 김현의 말대로 하나의 스타일, 즉 “키치(kitsch)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강한 개성과 뚜렷한 캐릭터 - 용대운은 인물의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를 지닌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반세기 동안 주인공의 지위를 독점했던 명문 세가(世家)의 초인(超人)과 대협(大俠), 반안·송옥의 대명사로 대변되던 절세 미남은 여전했지만, 표사, 호위, 학사, 의생, 살수, 낭인, 숙수, 파계승, 귀환 병사, 악당 등이 새로운 주인공으로 확장되었다.


허구 맹랑한 기연의 연속보다는 개연성 있는 수련을 가미함으로써 성장소설의 맛을 더하기도 했고, 수련과정을 생략한 채 이미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인물이 바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선인지로(仙人之路), 횡소천군(橫掃千軍), 태산압정(泰山壓頂) 같은 초식들은 작가의 숙고를 거쳐 새로운 초식과 무공, 무도로 창안되었다. ‘노루표(포루노) 무협지’로 폄하되던 남녀상열지사도 나름 순수한 사랑으로 대체된다. 역사적 사건을 재해석을 거쳐 적절히 가미함으로써 교양소설의 요소도 충분히 담았다. 이 시기의 주요 작가로는 용대운(군림천하), 좌백(대도오), 풍종호(일대마도), 진산(홍엽만리), 최후식(표류공주), 이재일(쟁선계), 한수오(월야강호), 설봉(암천명조) 등을 들 수 있다.


인터넷은 진화를 거듭하고, 작가군과 독자 계층이 동시에 두꺼워졌다. 종전 무협 작가의 진입이 자료의 제한, 출판시장의 한계로 일종의 도제 성격을 지녔던 독점적 구조였다면, 이제 실력만 있으면 누구나 글을 쓰고 작가로 등용될 수 있었다. 이 시기 가장 독보적인 필체와 탄탄한 구성으로 입지를 구축한 작가는 얼른 손으로 헤기 벅찰 정도이다. 초우(호위무사)와 장영훈(보표무적), 한백림(무당마검), 전동조(묵향), 조진행(칠정검칠살도) 등이 있다. 이밖에도 황규영(잠룡전설), 검류혼(비뢰도), 최현우(학사검전), 수담옥(사라전종횡기), 이문혁(무림해결사 고봉팔), 태규(풍사전기), 문우영(악공전기), 이우형(유수행) 등이 자기만의 개성과 세계관으로 사랑을 받았다.


무협지 - 무협소설 - 장르문학 - 경계문학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무협소설 시장도 큰 변화를 겪는다. 문피아, 북큐브에 이어 네이버의 시리즈, 카카오페이지 등 웹 소설과 웹툰이 새로운 비즈니스로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1권 분량을 무료로 제공하고, 2권부터 1회 100원을 결제하고 읽는 시스템이다. 통상 20화 혹은 25화 정도가 과거 책 한 권의 분량인데, 다음 회 구매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빠른 스토리기 전개, 감수성 튀는 문장 감각이 요구되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어떤 경향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천마물과 회.빙.환 – 회귀, 빙의, 환생의 첫 글자를 땄다 – 소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경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소설의 제목도 감각적이다. <칼에 취한 밤을 걷다/유진성>, <강호 미치다/최재봉>, <칼끝에 천하를 묻다/오채지>와 같이 사자성어에서 벗어나 우리말이 사용되었고, 독특한 문체와 스토리로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뛰어난 작품이었다.


정리해 보자. 무협소설은 중국, 대만, 홍콩 등 본토에서는 퇴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국에서는 그 열기가 식지않고 있다. 특히 초우의 <호위무사>는 2007년 중국에 역수출한 최초의 한국 무협소설로 장안의 지가를 올렸다. 지리와 문화, 역사와 정서가 판이한 중국을 무대로 하고 있어 ‘귀화 문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협을 읽는 독자의 사정은 각각 다르고, 나름의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는 ‘무협지’로 - 4~50대 독자들은 아직도 무협지라고 부른다 - 불렸다는 사실이다. '무협지=저질문학'이란 등식의 고착화, B급 문화로 낮춰보겠다는 암중 노력한 흔적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마니아들의 노력으로 '무협소설'의 지위는 회복했고, 일각에서는 SF, 환상소설, 판타지, 괴기소설 등을 합쳐 '장르문학'이라고도 한다. 혹은 ‘경계 문학’이란 용어도 자주 사용된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을 연결하는 중간 장르, 그러나 독자층만은 확실한 그 어느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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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소설 : 사랑-대의-성장-계략-인생


이제 무협 소설 영역에서도 실존주의나 포스트 모더니즘을 언급하는 평론도 등장하고 있다. 주제가 권선징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나름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 점은 순수문학이건. 실천문학이건, 장르문학이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십여 년 전 우연히 눈에 들어 왔던 와룡생의 <비연>으로 무협 인생을 시작했다. 오백 질 이상은 읽지 않았을까? 책상 아래 소장용으로 모아 둔 중고 무협 세트로 빼곡하다. 몇 년 전부터 무협소설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대사가 나오면 필사를 하곤 했다. (어떤 문장은 표절임을 알고 지워 버렸다) 하나하나 모아 <무협, 나를 움직인 문장과 대사>를 쓰고자 한다. 다만 무협영화 또한 같이 다루었으면 한다. 많은 무협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므로.


저의! 그런 건 없다. 무협 (소설과 영화)을 즐겼고, 즐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즐길 마니아로서 한 번쯤은 정리하고 싶었다. 어차피 해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사랑(愛), 대의(義), 성장( 進), 경영(略), 인생(生)의 다섯 카테고리로 나누려고 한다. 써다보면 머릿 속에 내장된 줄거리가 희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시 읽거나 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나의 또 다른 필명은 ‘소리비도 이발불요(小李飛刀 二發不要)’이다. 어디서 나왔는지 무협 마니아들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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