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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보람 Mar 09. 2023

결혼 인사 드리러 왔다가 밥까지 차려본 사람?

그가 내 집에 인사 오던 날.

어쨌든 양가에 인사를 드리기로 했으니 준비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선물. 



이 선물은 부모님들이 꼭 필요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형식, 예(禮)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격이 비쌀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는 예의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격이 비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동물권과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어 가능하면 육식과 쓰레기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포장이 적고, 고기가 아닌 것으로 선택하고 싶었다. 과대포장 하지 않은 과일 같은 것들. 



그는 고기나 전복, 화과자 등등을 제안했고 모두 내 예상보다 가격도 비싼 데다 쓰레기도 많이 나올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며칠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내 머리에서는 슬슬 열이 나기 시작했고, 벌써 결혼이 싫어지려고 했다. 10여 년을 사귀어오면서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는데, 우리 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니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그냥 둘이 사랑하면서 살면 이런 고민들을 하느라 시간도 에너지도 쓰지 않고 행복할 텐데, 왜 결혼을 해야 하지?



결국 나는 화를 덜기 위해 선물에 대해서는 그가 알아서 하도록 전권을 위임(?)했다. '아 몰라! 알아서 해!'는 아니었고, 어떤 결정이든 당신의 뜻에 따르겠다는 취지였다. 그는 나의 양보에 고마워하며 화과자로 결정했고 열심히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아 예약한 뒤 당일에 직접 픽업해 왔다. 




결혼 전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모습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장면이 있다. 남자가 여자의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는 그 장면. 아마 영화, 드라마, 광고에서 많이 보아온 클리셰이기 때문일 텐데 나는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는 남자 부모님께 가서 큰절을 드리지 않는데 왜 남자는 여자 부모님께 큰절을 드리는 것일까? 왠지 '딸을 저에게 주십시오.'처럼 느껴졌다. 또는 남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남성다움'을 강요받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게 미리 요청했다. 내 부모님을 만났을 때 큰절을 하지 말아 달라고. 그는 난처해했다. 그것이 예의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것이 예의라면 나도 그의 부모님께 큰절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다행히 나의 긴 설명 끝에 그가 설득되었고 우리는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로 함께 절을 올리기로 했다. 부모님 댁으로 출발하기 전에 나의 집에서 만나 미리 대사와 절하는 방법을 연습까지 했다. (냉장고를 향해 말을 하고 함께 절을 하는 우리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을지도.)




드디어 그날. 

요리가 업인 그가 나의 부모님 댁에서 회를 떠드리기로 했기 때문에 그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물살이들을 사고, 연남동에 들러 화과자를 픽업한 뒤 큰절 연습(?)까지 하는 바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는 함께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집에는 직계 가족뿐 아니라 할머니, 이모들, 동생의 남편까지 모두 모여 있었고 들어서자마자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그가 부모님과 할머니께 소파에 앉으시라고 한 뒤 준비한 멘트를 했다. "저희가 같이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의미로 절을 올리고 싶어서 큰절 한 번 드리겠습니다." 



글로는 담담하게 적었지만 그도 나도 무척 긴장한 채로 절을 올렸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그에게 호통을 치셨다. 왜 더 빨리 오지 못했냐고.



그 뒤 그가 사 온 생선을 손질해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빠는 "이제 안(동생의 남편)도, 류(나의 애인)도 한 가족이 되었으니 기쁜 일이 있을 때나 슬픈 일이 있을 때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즐겁게 살아보자"는 건배사를 하셨다. 



별 일 없이 식사를 하고 환대 속에 인사를 마친 우리는 얼떨떨한 마음이었다. 집을 나설 때는 가족들이 모두 그에게 한 번 안아보자고 해서 프리허그(?) 시간도 가졌다. 그는 무척 행복해했고 나도 가족들에게 감사했다.




그날 밤 동생이 집에서 찍은 동영상들을 가족 채팅방에 올렸다. 나와 그가 절을 하는 장면, 그가 회를 손질하는 장면, 아빠의 건배사 등등이 있었는데 영상을 보니 큰절을 올리고 긴장해 있는 그에게 아빠가 다가가 안아주고 있었다. 그에게 영상을 보내주니 그도 몰랐다고 했다.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긴장했었나 보다. 



어쩌면 내 집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 결혼 준비의 시작이자 큰 산이었는데 그 높은 산을 축복 속에 훌쩍 넘겼다. 그의 부모님을 만나는 자리도 잘 해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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