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야 행복한 모습이 담기지.
우리의 제주 여행은 2박 3일이었고, 촬영은 둘째 날이었다.
당일 아침엔 왠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초록 에너지가 가득하던 20대 초반에 만나 10년을 사랑한 파트너와 제주도를 여행하며 결혼사진을 촬영한다니. 날씨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맑아서 더 설레기도 했다.
숙소에서 옷과 부케 등 소품을 챙긴 뒤 커피 한 잔을 마시려 했는데 컵이 없길래 밥그릇에 카누를 말았(?)다. 이마저도 우리다워 웃기고 즐거웠다.
점심으로는 류가 먹고 싶다는 성게알 덮밥과 전복 미역국을 든든하게 먹었다. 촬영을 한다고 하면 일찍 일어나 샵에 가서 몇 시간 동안 화장과 머리를 하고 밥도 못 먹은 채 몸이 꽉 조이는 드레스를 입어야 할 것 같았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일어나 숙소 마당에서 커피를 마시고 맛집에서 거하게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식사 후엔 미용실에 들렀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곱슬머리인 나는 촬영하는 동안 머리카락이 나보다 더 나대지 않도록 드라이를 받았다. 가격은 2만 원이었나. 미용실 선생님이 차분하게 펴주신 머리를 한 채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드디어 친구(사진 작가)를 만나러 갔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돌고래 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서로의 일상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좋아하는 오름으로 향했다.
자연만 있을 뿐 건축물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곳을 산책하며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걷고, 뛰고 안고, 웃는 모습들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우리도 익숙해지면서 표정도 더 자연스러워졌다.
촬영을 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우리를 담는 것'이었다.
많은 결혼사진들에서(특히 스튜디오 사진들) 남자들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당당한 포즈를 취하는 반면 여자들은 입가에 손을 대거나 남자에게 팔짱을 끼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런 사진들을 볼 때마다 결혼이 더 멀게만 느껴졌고 나는 저런 사진을 촬영하거나 저런 모습의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남성은 주체적으로, 여성은 수동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런 사진들이 계속 '아름다운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보여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듬직한 남성', '사랑스러운 여성'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여담으로, 결혼식장에 갈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든든한 신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 라는 멘트를 들을 때마다 매우 부담스럽다.)
사전에 친구에게 이런 생각들을 전달해 두었고 덕분에 촬영 시간 내내 우리 모습 그대로,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오름 두 곳과 한적한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는 즉흥적으로 세워서 놀기도 했다.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노을마저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고 앞으로도 이 날을 잊을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단지 청첩장에 담을 사진을 찍는 날이 아니라 힘들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행복한 시간- 그런 날이 되었으니까.
본식 당일에도 사진 촬영을 했지만 우리를 더 잘 담아낸 사진은 당연히 제주에서의 스냅사진이다. 촬영한 지 1년이 더 지났지만 요즘도 가끔 이 사진과 시간들을 꺼내어본다. 앞으로도 종종 꺼내보겠지?
덧 1.
나는 사진을 거의 보정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류는 자신을 날씬하게 보이도록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덧 2.
중고나라에서 구입했던 조화 부케를 다시 판매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친구가 구입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에게 선물했다. 촬영 당일 입었던 중고 원피스들도 모두 다시 판매했다.
덧 3.
오름에서 다른 커플들이 촬영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몇 팀 보지 못했지만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있었고, 드레스를 잡아 주는 '헬퍼'라 불리는 분의 도움으로 오름을 오르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길이 꽤나 좁고 가파른 오름이었기 때문이다. 허리도 꽉 조여져있을텐데 혹시 쓰러지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덧 4.
사진 작가의 다른 사진들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lailail.l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