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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mini Apr 18. 2024

3월의 책

위대한 개츠비 / 빈 옷장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3월에는 세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2월 후반 내리읽던 개츠비를 3월이 되자마자 완독 했고 무라카미의 책은 마지막 날 혼자만의 자유 시간을 누림으로써 훌훌 읽어낼 수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독후감 아닌 독후감을 적었지만 브런치에는 이제야 정리해 올린다. 안타깝게도 4월엔 무슨 일이 그리도 많았는지 한 권을 읽으면 그나마 다행인 축에 속할 것 같다.






《위대한 개츠비》

- 스콧 F. 피츠제럴드, 열린책들, 2011.


  하루만 빨리 읽었어도 2월에 두 권 읽은 것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쉽다. 작가인 피츠제럴드가 대중적인 소설을 썼다고 알고 있었고 그래서 괜시리 이 책을 읽기 싫었다. 이 책이 혹시 그저 그런 상업 소설은 아닐까. 하지만 마치 재미난 구경을 안 보려 해도 언뜻언뜻 어깨너머로 곁눈질로 보는 것처럼 읽고 싶은 마음도 반이나 있었다. 디카프리오가 나온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원작을 한번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싶다.



  줄거리를 설명하고픈 마음은 없다. 줄거리는 인터넷을 찾아봐도 나오지만, 책을 읽으면 알아서 머릿속에 입력되는 것이니까. 글을 읽고 쓰는 감상 후 적는 글에는 그래서 늘 읽은 후의 주관적인 느낌이 어땠는지만 쓰려고 한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고 솔직하게 적어야겠다. 내가 조금 더 어렸고 근시안의 눈을 했었다면 깊은 감명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순수한, 한 사람만을 사랑한 내용의 소설이라니. 개츠비라는 인물에 대해 찬사 했을지도.



  하지만 지금 내 눈으로 보기에 개츠비는 집착적이고 다소 광적인 것 같았다. 광기 어린 사랑에 속물과 반대되는 의미로써 순수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나, 몇 번이나 의아한 마음이었다. 데이지의 선택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과연 사실대로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는지. 이기적인 인간의 양태라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지 않나 싶었다. 솔직하게 잘못을 드러내고 처벌을 받는 것은 어른에게도 과감한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던가(그런데 아이들에게는 솔직하라고 가르치니, 그 작은 몸에서 나오는 용기란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속물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개츠비의 사랑이 순수함의 결정체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이란 것을, 멈춤 없이 움직이고 변하더라는 사실만을 느낀다. 나는 어떻게 변한 걸까?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춘 것일까, 아니면 비윤리적인 행태에 무감각해진 것일까?



푸른 나뭇잎 사이로 유령처럼 잘 보이지 않는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중략)…. 한편 서글픈 호른 소리에 흩날리는 장미 꽃잎처럼 새로운 얼굴들이 마루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맨 앞은 끔찍하게 검은 비에 젖은 영구차, ……(하략)


개츠비는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물러나는 환희의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면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며,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어느 맑은 날 아침에는……
그래서 우리는 조류를 거슬러 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나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빈 옷장》

- 아니 에르노, 1984BOOKS, 2022.


  너무 충격적이었던 글의 시작. 낙태를 하는 장면이었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욱 충격인 건 이 소설이 자전적 에세이라는 것. 경험해 본 일만 적는다는 작가의 솔직함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솔직해도, 이 작가 괜찮은 걸까? 어떤 낙인도 두렵지 않아? 아니 에르노이자 르쉬르인 이 사람.



  그녀가 적는 글은 처음에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짓궂은 장난. '더러운' 환경. 나는 <심슨 가족> 같은, 외국 사회를 보여 주는 애니메이션을 보면 이상하게 구역질 올라오고 메스꺼움을 느끼는 타입인데(강조하건대 결코 인종차별을 하거나 문화 우월감/열등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 같은 감각을 느꼈다. 너무나 지나치게 날것의 글이어서? 그건 아니었다.



  책을 그만 볼까. 초반부까지 꽤 여러 번 생각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보았던 까닭은… 아기를 재워놓고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읽는 일이 숨어서 만화책 읽는 것처럼 짜릿하고 재미있어서였고, 과연 이 소설의 끝이 어떻게 날지가 궁금해서였다. 이 역겨운 상황을, 작가는 어떻게? 이게 자전적 소설이라니까 한층 더 궁금해서 배길 수 없었다. 진부한 저녁 드라마처럼 부모와 드러내놓고 갈등을 빚을까? 그리고 점점 르쉬르의 행위들이("쌍년"이라는 단어조차도) 모종의 발버둥 같아 보였기 때문에 눈길을 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작가의 소설은 삶처럼 끝맺음을 지었다.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삶에서 칼로 무 자르듯 단면이 깔끔한 일은 잘 없듯이. 그녀가 사랑에 미쳐 사랑을 찾아다녔다고 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녀가 벗어나려고 했던, 그녀의 출생 때부터 따라다닌 그 모든 것들. 그녀에게는 사랑도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 같아 보였다. 지난날의 허물을 버리기 위한.



  이 소설의 결말이 벌써 기억나지 않는다. 작가의 다음 책도 이럴까?



학교의 여자애들처럼 품위 있게 되기 위해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커튼을 교체한다거나 계단에 윤을 낸다거나 하는 별거 아닌 문제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따라잡아야 할 취향의 결여이자 비뚤어진 하찮은 것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방의 오리 같은 노란 장판부터 소금과 오래된 종이, 연필이 흐트러져 있는 계산대까지... 바뀌었어야 했던 모든 것들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2016.


  즐겁게 읽었다. 작가의 장편소설 루틴인 매일 200자 원고지 20매라는 어구에 흥미가 생겨서 읽었는데, 예상외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게 된 기쁨이 있었다. 머리엔 있었지만 손끝으로 나오지 않던 나의 생각들을 누가 콕 집어 대신 적어준 것 같아 막힌 속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 속이 시원해서 훌훌 더 쉽게 읽었다.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손끝으로 꺼내는 건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 능력을 터득하고 싶어서 기회만 되면 글을 쓰고 책을 읽고자 한다. 그리고 글을 쓰는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나는 거의 매번 나 자신과 유리된 감각을 느끼고 이는 존재론의 핵심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글이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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