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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미니 Jun 14. 2024

5월의 책

6월 중순이 되어서야 올리는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책을 다 읽고 쓰는 감상문의 제목은 늘 책의 제목이었다. 이번에도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라고, 쌍꺾쇠를 써서 적었어야겠지만 그러기엔 아쉬워서 다른 제목을 붙여봤다. 이 책은 애월이를 임신하면서 읽게 된 《돌봄과 작업 1》을 다 읽고 뒤편인가에 적혀 있던, 이 출판사가 출간한 다른 책이었다. 방해꾼도 아니고 방해자라고? 호기심은 단어 하나 차이로 생겼다. 「하긴, 꾼이라고 하면 아기를 향해 쓰기는 좀 그랬겠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출산을 하고, 밀려있던 읽기 리스트의 다른 책들을 하나씩 읽고 이 책까지 왔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을 4월 내내 읽었는데 결국 5월 시작에 마지막 장을 덮음으로써, 4월에 읽은 책은 빵권(0권)이 되겠다. 애석해라. 하지만 이게 나의 최선이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인용할 문장들 적는 건 포기했다. 어떻게 하나같이 이렇게 내 마음을 구구절절 대신 말해주고 있는지. 너무 많아서 한도끝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여성 예술가(미술, 소설 작가)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어떻게 양육과 작업을 같이 했는지를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아주 모범적으로 삶을 꾸렸고(그 자신은 괴로웠지만) 누군가는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정을 꾸렸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 자식의 인생을 희생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사포보다 더 거칠게 혁명의 대열에 뛰어올랐다. 모성이 주는 하늘의 축복같은 감각. 하지만 철저히 빼앗기고 조각조각나는 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쁨과 동시에 느끼는, 더는 작업을 지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어둠의 골짜기보다 더 깊게 분열된 머릿속을 먼저 느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애월이를 키우면서, 나의 경우는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는데다가 남편의 무한에 가까운 협조로 괜찮은 편임에도 시간이 없다. 긁고 긁고 또 긁어봐도 시간 부스러기도 안 나온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 남편이 애월이를 봐주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시간이다(아니, 뭐 했다고 오후 5시 반이나 됐지!). 남편이 쉬는 날 애월이를 보는 사이에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밥을 차리고(나는 결혼식에서 그에게 밥을 차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한 요리를 그가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니까) 또 설거지를 하고(남편이 하기도 한다. 그럼 나는 다시 육아의 세계로), 젖병을 씻고 등등등. 일반 쓰레기는 애월이의 기저귀로 2~3일에 한 번은 비워줘야 한다. 아주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들이 내 시간과 에너지를 먹고(먹어야만) 사라진다.



  읽는 것만으로 위로를 받고,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한, 너무나 멋진 책이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년기와 관련된 무언가를 읽고 싶어서 제목만 보고 골랐다가 이 무슨 총질과 시체 묘사가 즐비한 책인지. 이 책을 택배 서비스로 빌렸다고 하니 남편은 예전에 영화로 봤다고 했다. 「그거 살인마 이야기야」 범죄 심리 비문학 장르를 좋아하는 나는 연쇄살인마 소설인가 싶어 흥미를 가졌는데 딱히 그렇다기보단 안톤 시거라는 등장인물이 어떤 예외 없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 죽이고 다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주인공 루엘린 모스가 그와 엮이면서 도망가는 이야기. 줄거리만 보자면 그렇다.



  뭐랄까. 한눈에 조망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소설이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았다. 특히 제목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좀 더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노인? 루엘린 모스도 안톤 시거도 노인이 아니다. 노인에 가까운 등장인물은 보안관 벨이다. 유독 책에는 벨의 내레이션이 중간중간 많은데 그가 바라보는 미국 사회는 곧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부패해가는 나라다. 마약, 살인, 돈. 늘어난 미해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벨은 보안관 자리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퇴장한다. ’지성과 영혼의 기념비(노인)의‘ 패배.



  작가는 모스와 시거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하고 싶던 말은 미국 사회에 대한 절망적인 자신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가 느꼈을 무기력감이 벨을 통해 느껴진다. 벨의 베트남전 참전과 훈장을 받았던 이야기,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모스는 히피들에게 부정당했고, 그 히피들이 만든 지금의 미국 사회는 어떤가? 마약이 넘치고 살인, 방화 따위의 범죄가 더 늘어나 걷잡을 수 없다, 이미 한계점을 넘어 멸망은 스스로 구르며 커지기 시작했다(스노볼), 고 생각 하지 않았을까.



  그와 반대로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은 흥미진진했다. 굉장히 잘 표현해낸 것 같다. 근데 다 읽고 나니 그쪽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웃음). 작가가 이야기의 무게를 설정하는 방식이 특이하다. 다 읽고 나서도 왜 제목이 이걸까를 한참 생각해야 했다. 책의 첫 장에서 소개하는 예이츠의 시를 다시 읽어야 했고(애월이에게 읽어주니 관심이 없는지 딴청이다) 끝에 담긴 옮긴이의 말도 읽어야 했다(생각이 개입될까 되도록 읽지 않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생각의 과정이 필요했던 책이어서 꽤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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