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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보 Apr 16. 2018

4.16.

부끄러운 고백

현장학습을 가는 날,
교실에 오니 칠판의 날짜란 밑에 누가 [세월호4주기…ㅠㅠ]라고 적어놨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었는데, 그 칠판의 문구를 계기로 함께 잠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짧은 묵념을 하고 이제 너희들이 할일은 즐겁게 놀고 안전하게 돌아오는거야! 라고 말해주었다.
_
마침 오늘의 날은 너무 맑고 아름다웠다. 현장학습을 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운 좋은 하루에 아이들은 행복해했고, 아이들이 행복하니 나도 좋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무사히 학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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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이 현장학습날이라는게 처음에는 아이러니했습니다.
하지만 이해는 갔습니다. 학교의 빡빡한 일정과 시기 등을 고려했을때 우연히 가장 적당한 날이었겠지요.
4년이 지났는데, 모든 사람이 이 날을 기억하고 추모해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4월 16일은 제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날입니다.
당시에 잃은 수많은 목숨들도 아프게 다가왔고,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와 무책임에도 분노가 치밀었지만, 갓 신규교사란 이름표를 떼고 교사란 직업에 적응했다고 느낀 저에게 그날은 제가 알고 있던 제 직업에 대한 관념을 무너뜨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수학여행을 인솔하던 14명의 교사들 중 1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나오신 교감선생님은, 학생들과 동료 교사를 보낸 자책감과 슬픔에 저승에 가서도 이들의 스승이 될 수 있을까를 물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 아직 애라고 생각했던 저보다도 어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사란 수업을 잘해서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아이들이 교실에서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는 교사는 그런 직업이라고 생각했지 아이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려야 하는 직업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에게는 다음의 질문이 꼬리표처럼 따라왔습니다.
나는 우리반 아이들을 위해서 나의 목숨을 희생할 수 있을까? 나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과 마지막으로 통화할 수 있는 기회도 저버리고 내 학생들을 구하러 사지를 향해갈 수 있을까? 그 후로 현장학습을 갈 때, 수학여행을 갈 때, 청소년 단체에서 야영을 갈 때 문득문득 만약 여기서 사고가 난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트라우마처럼 따라왔습니다. 지금 맡고 있는 이 아이들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결심과 아직 죽을 수는 없다는 삶에 대한 미련 속에서 우스운 방황을 하곤 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라고 결심하지 않으면 교사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고, 그렇다고 해서 죽을 결심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저는 제가 선택한 이 교사라는 직업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직업을 진짜 내가 해낼 수 있을지 무섭고, 용기가 안나고, 같은 처지의 많은 선생님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습니다.

그날, 그 선생님들을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기꺼이 몰고 간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에 그분들은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하셨을까요? 아마 그 분들은 그 순간 자신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단원고 교사 뿐 아니라 당시에 세월호에서 마지막까지 승객을 챙기던 승무원과 직원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 순간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명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직업, 자신의 역할이 주는 사명감이 그 순간 그들을 움직였을 겁니다. 반면에 그 당시에 지탄받았던 선장, 선원, 그리고 전대통령까지... 그들에게 없었던 것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사명감'이 없었습니다. 살아남았음에도 그들은, 아마도 제 기준에서겠지만, 그들 스스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제가 학생들을 외면하고 살아남는 상상을 해봐도, 그것이 더 나은 삶일거란 상상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아남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괴로웠던 이유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명감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요? 무엇이 그들을 용기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도대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최근 공부하는 건명원에서의 배움과 연결지어 보니 어쩌면 사명감도 탁월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탁월함이 결국 '나는 누구인지'를 알고 그것의 최상의 높이를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라면 탁월한 나는 분명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 내가 가는 길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업이 자신과 일치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제자들을 위해 바다로 향하는 교사는, 타오르는 건물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한 사람을 위해 불길을 뛰어드는 소방관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총구를 앞에 두고도 전진하는 민주열사는 아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자신의 목숨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의 삶과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이런 질문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그들이 하는 일이 곧 교사가 하는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교사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먼저였을 것입니다.
결국 사명감이란 내가 바로 그 존재가 되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한 사람인지 알고 있고 그것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사명감은 탁월한 사람들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그것이 곧 그들의 삶이며, 그들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저는 아직 탁월한 교사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인지 아직 답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탁월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업에 사명감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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