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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Oct 22. 2021

눈 오는 날 잊지 못하는 곱창전골/ 김태희

다시 겨울

대학교 때 나는 한창 바쁘고 힘들었다. 일본 인턴십은 내게 도피였다. 대학교 동기 모두가 토익과 한국사를 준비하며, 취업준비생 신분일 때. 나는 그저 쳇바퀴를 제시간에 굴리는 철창 속의 햄스터 같았다. 이 삶이 싫었다. ‘제2외국어 실력 향상’이라는 변명으로 일본으로의 인턴십을 결정했다.


일본 센다이에 도착했을 때, 공항의 풍경은 김해 국제공항과 다를 게 없었다. 그냥 한국 같았다.

한국에서 여러 차례 울리던 휴대폰이 일본에서 울리지 않았다. 내가 알고, 나를 아는 그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자 그제야 나는 해외에 나왔음을 실감했다. 내가 알던 세계로부터의 ‘고립’이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일본 적응은 하루면 충분했다. 나는 일본 라멘, 소바, 편의점 음식을 골고루 먹으며 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였다. SNS에는 ‘일본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먹거리 리스트’가 떠돌았다. 도쿄 히요코만쥬(병아리만쥬), 겨울 로손편의점에만 파는 딸기 모찌(찹쌀떡), 타마고산도(계란샌드위치) 등이 리스트를 가득 채웠다. 리스트 덕에 다양한 음식을 맛봤지만 리스트 안에는 추억이 될만한 음식은 없었다.


일본 인턴십 중 내가 근무했던 호텔은 온천 지역의 오래된 큰 료칸이었다.  퇴근 후에는 꼭 온천에 들러 하루를 마감했다. 3월에도 머리 위로 소복소복 쌓이는 함박눈을 맞으며 노천탕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일은 달콤한 행복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한 표정으로 노천탕서 눈을 맞아 앉아있으면 같이 근무한 동료들과 손님들이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주제는 대부분 먹거리였다.


어느 날 이 지역 맛집을 찾고자 호텔에 묵었다는 손님을 만났다. 여느 때였다면 일과에 지쳐 간단한 호응으로 끝냈을 대화였다.


“도교에서 심야버스로 8시간 달려왔습니다.”


손님의 말 한마디에 나는 수많은 물음표를 그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그 가게가 어디인가요? 주 메뉴는 뭐죠? 음식이 다른 음식점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노천탕 바위 위로 함박눈 높이 쌓여만 갔다. 한 음식점을 가지고 나는 손님과 알몸으로 뜨거운 온천에서 떠들었다. 한참을 떠들다 음식으로 열을 올리며 이야기하는 서로가 웃겼다. 손님과 나는 깔깔 웃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음식을 먹기 전 꼭 ‘야마데라(山寺, 야마카타에 있는 절)’를 다녀오세요.”


손님의 말에 나는 휴일이었던 다음 날 바로 이 지역의 명소인 ‘야마데라’를 갔다. 설산을 등산해야 했는데 이 역시 손님의 추천이었다. 손님은 한 가지 당부도 덧붙였다.


“곰이 나오니 조심하세요.”


정말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길을 지켰을지 모르는 울창한 대나무 숲을 얼마나 걸었을까. 야마데라가 보였다. 눈은 이미 내 허리만큼 쌓여, 길만 겨우 있는 설산을 올랐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니 그 손님이 아니었다면 경험조차 못했을 ‘일본’이라는 나라의 고즈넉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숨이 코와 입에서 차 올랐다. 아쉽게도 야마데라 개방시간이 5분 초과해, 소원을 빌지는 못했다.  문 닫힌 야마데라를 보며, ‘그래도 바쁜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일본을 찾는 나의 소원은 이뤄졌네’하며 중얼거렸다.

다음 코스는 아시노유(길가에 있는 족욕탕. 정자처럼 생겨서 족욕을 할 수 있는 온천욕장)에 들러 지친 발을 녹이는 것이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내리는데, 지붕도 가림막도 있는 족욕탕이지만 함박눈을 막을 정도의 튼튼한 방어막이 되진 못했다. 옷은 차갑게 젖어 들어갔지만 기분은 최고였다. 함박눈과는 대비되는 뜨거운 온천수에 무릎 밑까지 담그고 있자니 그동안 치열하게 살면서 나를 돌보지 못했던 죄책감마저 사르르 녹았다.


그렇게 기숙사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마지막 코스를 갔다. 그 손님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 집. 곱창전골을 파는 음식점이었다. 손님은 음식점의 ‘간판 메뉴’는 이카야키(오징어구이)고 숨겨진 히든카드가 바로 곱창전골이라고 했다.


“손님, 혼자 먹기에는 양이 많을 건데요?”


“괜찮아요. 빨리 주세요. 아! 그리고 따뜻한 사케 한 잔도 부탁드립니다.”


내가 있던 지역의 지자케(그 지역의 사케)는 조금 달달한 편에 가벼운 맛이 특징인데, 따뜻하게 마시면 정말이지 그 어떤 술도 생각나지 않았다. 술 한 모금을 꼴깍 삼키고 보글보글 끓어가는 곱창전골을 보니 그 손님이 왕복 16시간을 버스에 투자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이해가 됐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하얀 곱창전골을 먹었다. 마늘로 잡내를 없애는 한국식 전골과는 달리 생강으로 산뜻한 풍미가 입맛을 사로잡는 전골이었다. 혼자 이자카야에 앉아 따뜻한 사케와 함께 ‘오늘’을 곱씹었다.

따뜻하고 고소한, 그리고 산뜻한 곱창전골이 서서히 야채의 단맛을 빨아들여 더 맛있어질 즈음 내일을 위해 이만 오늘과 인사해야 했다.


“잘 먹었습니다.”


가게 앞이 허리춤까지 눈이 쌓여있었다. 따뜻한 사케로 데운 몸은 식을 줄 몰랐다.


한국의 남쪽 지방에서 함박눈 밟을 일이 잘 없지만, 가끔 세상에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면, 그때의 내가 그립다. 곱창전골의 추억을 야금야금 먹으며 나는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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