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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Apr 02. 2022

냉기


 손발이 너무 시리다. 그러나 녹일 수가 없다. 아니, 더욱 더 참혹하게 부르르 떨린다. 일시적인 이 운명 속에서 매몰찬 원망이 자라나 버스기사나 버스회사로 향해 쏟아진다. 영하 10도를 웃도는 혹한의 냉기를 저들은 한낱 거리의 행려자로만 여기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금전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자연과의 투쟁을 엄숙히 선언이라도 한 것인지. 심지어는 촌사람이거나 서민이라는 약자 위에 군림한 탓으로 그들 인간의 존엄성을 한낱 사치로만 여기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분노가 돌개바람처럼 휭휭 일어나면서 고함이라도 내지르고 싶다. 그러나 내 성격상 쉽지 않다. 궁상맞도록 내성적인 나의 천성으로 보자면, 우르르 떼 지어 몰려드는 시선이야말로 추위보다도 더욱 혹독한 독화살 세례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내 감정보다 더욱 군림해 있는 이 성향을 어찌할 도리는 없다. 그저 참아야 한다.


 어쩌면 나는 저들이나 버스기사에게 아주 이상한 이방인 일지도 모른다. 추위에 이토록 심드렁해진 나야말로 대중의 공공 편의시설에 익숙지 않은 일상생활의 부랑자로서, 대나무꽃 백년마다 한 번 피듯 어쩌다 한 번 있게 되는 시골버스 이용에 도무지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채 투덜대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자 당연한 듯 강추위를 견디지 못해 덜컥 서버린 고장 난 나의 지프차가 고약한 놈이 된다. 문득 한숨이 터지고 나의 지프차에 못지않게 덜덜거리면서도 용케도 잘 달려가는 버스가 마냥 부러워진다. 그리고 그 부러움은 놀랍게도 차 속의 풍경을 전혀 심심하지 않은 시장통으로 만들고 만다. 갑자기 삶의 체취를 흠씬 풍기는 분주한 모습들이 술렁술렁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골버스 속에서 점잖은 태도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침묵이 얼마나 맥없는 일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대부분 촌로들은 언제라도 입을 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준비가 없는 자는 대부분 세대를 달리한 청년기이거나 낯선 이방인이다. 하지만, 흥겨운 호기심까지 없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시골버스의 쾌활한 잔치에 동참 되어 있는 셈이다.

 바닥에 놓인 작은 석류나무 묘목 한 그루로부터 수만 갈래의 이야기가 피어오는 것도 이 시골버스로부터이다. 석류나무는 한 사람으로부터 명찰이 달린다. 차의 복도를 지나올 때 발목을 살짝 스쳤던 밋밋한 줄기로만 있는 저 나무의 이름을 내가 어찌 알았으랴! 지식이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더욱 쌓이는 법. 사실 내게 석류나무는 오직 영원의 석양 같은 주홍빛 꽃과 탐스런 열매로서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 순간에서야 비로소 열매의 근본을 키워낸 줄기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명찰이 달린 석류나무 묘목은 자신의 생을 이 작은 사회 속에 송두리째 들어내어 놓을 수밖에 없는 데, 그의 삶을 인정하는 여러 전문가가 나타나 온갖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금전적 가치를 따지는 경제인이 있는가 하면, 욕을 얻어먹는 판매인에 옹호론자까지 나서기도 하고, 묘목관리를 위한 조경업자는 물론이요, 건강과 약효에 관한 한의사가 나타남도 당연하다. 그리고 나같이 짐짓 무관심한듯하면서도 열렬한 경청자도 있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침묵이 뚝 떨어진다. 석류나무에 대해서 나올 이야기 다 나온 모앙이다. 그러나 이 침묵이야말로 장작더미 아래의 불쏘시지나 다름없는 데, 이내 인정된다. 

 이번에는 한 개의 조그만 요구르트 병이 문젯거리로 등장한다. 누군가가 마시고 난 빈 병이 복도로 굴러 나왔는데, 차가 요동칠 때마다 이리저리 구르며 다르륵다르륵 소리를 내었고, 결국엔 운전자의 신경을 몹시도 거슬러 고함소리를 터지게 만들고 만 것이다.

 어느 할머니의 고자질로 밝혀진 범인은 젊은 여성이다. 실수를 들켜버린 그녀는 비틀거리며 요구르트 병을 줍기는 했어도 지탄은 금방 그치지 않았다. 결국 곱디고운 얼굴을 붉히며 내내 고개 한번 들지 못하더니 어느 한 곳에 내려 도망치듯 뛰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동안 이 조그만 시골버스 사회의 지탄이 소용돌이치듯 빙빙 돌아가며 그녀에게 몰아쳤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필경 선악을 분별하는 신도 안쓰러워했음이 분명하다. 


 인간의 성장과 변화는 도시와 교육의 전용물이 아니다. 옛 세월을 마구 밀어내는 물질과 환경만이 인간의 진정한 교육자로 군림한다. 인간상은 그 시대의 물질과 환경에 버금 된다. 똑 같은 노래일지라도 달구지 위에서 흥얼거리는 노래와 버스 속에서 흥얼거리는 노래는, 노련한 음악비평가도 그 해석을 다 이루지 못하는 세월의 물결이 출렁거린다. 단순함도 옛 단순함이 아니다. 

 대부분 촌로들로 이루어진 이 시골버스의 조그만 사회 역시 단순하고 소박하기는 하나, 이미 옛날의 그 정겨움을 벗어나 있다. 정감 깊은 관용이 죄다 사라진 자리에 영악하고 기민한 처세술만이 앉아 있을 뿐이다. 오히려 거기에 단순함이 더해져 무지막한 판단 아래 누구 하나 그 연약한 아가씨를 위해 관용을 베푸는 자가 없다. 모두 우락부락한 운전기사의 위세에 주눅이 들고, 아부하듯이 응원을 보내며 악행을 악행의 잣대로 이리저리 재기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하긴, 이제는 두 번 다시 차내에 빈 요구르트 병이 구르도록 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교훈치고는 단죄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가련한 아가씨여! 

 그녀가 비워놓은 자리에서 인심의 마지막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하여 긴 한숨이 배어 나온다. 머지않아 밤이 오고 하루가 깊은 어둠 속에서 지나가고 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차 속에서의 일에 몸부림을 치며 이 경박한 사회를 오히려 증오하고 있으리라 여겨진다.


 무심한 것은 시골버스밖에 없다. 크고 작은 소요가 있든 말든 시골버스는 먼 산기슭의 백설의 지평을 향해 여전히 힘내어 웅웅거리며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버스 속은 다르다. 스스로도 유쾌하지 못한 언행을 남발했음을 자책하고 있는 걸까? 한바탕 무관용의 죄악을 치른 버스 속은 갑자기 싸늘한 침묵에 휩싸여 있다. 그 침묵에 다시금 분노 깊은 냉기가 파고든다. 버스에서 빨리 내렸으면 하는 조급한 마음이 몸을 더욱 덜덜 떨게 만든다. [끝]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송상호기자님 & PIXABAY –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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