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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하 Feb 20. 2023

1980년대 저녁 무렵의 추억

  온화한 마력이 숨 쉬는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안식의 활기가 흘러넘치고, 누구 하나 서로의 기쁨을 흩트리는 자 드물다. 이런 저녁 무렵에 나는 진정한 기쁨의 세계를 본다. 


  아이들의 활기가 가장 왕성한 때도 저녁 무렵이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집에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번번이 무시당하고야 만다. 그러다가 이웃집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나면, 이번에는 배고픈 아이들이 어머니를 집에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이런 틈바구니에서는 강아지들도 제 몫을 한다. 뛰고, 뒹굴고, 짖다가 갑자기 달려가는 곳이 있다. 저쪽 골목길에서 과자 봉지를 든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다. 실랑이는 끝나고 새로운 평화가 골목길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저마다 훈훈한 음식 향기를 쏟아낸다.  


  저녁 무렵에 만나는 젊은 연인들은 한낮의 커다란 공백만큼이나 커다란 사랑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는다. 그리고 당장은 음식점 살피기에 수선을 떤다. 연인들은 많은 음식점 간판의 눈빛을 연방 애처롭게 만들다가 겨우 한 곳에 함빡 웃음을 준다. 그 후 하루의 경과를 죄다 풀어놓기 시작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죄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저녁 무렵의 그들에겐 너무나도 즐거운 이야기들이어서 시종 함박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 절로 익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여름의 모진 더위도,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결코 저녁 무렵을 이겨 내지 못한다. 저녁 무렵은 공기와 같은 부드러움으로 세상 만물의 기세를 포용한다. 그리고 무언지 모를 희열 속으로 이끈다. 누구든 그 희열을 피하지 못한다. 아주 감미롭게 피하지 못할 사랑의 화살을 맞고, 아주 포근하게 안식의 화살을 맞는 것이다. 누가 쏘든 상관없다. 자연에서 나오는 것. 그 자연스러움만이 있을 뿐이며, 그로 말미암아 인생은 은총을 받는다. 저녁 무렵은 그렇게 인생을 포용한다.




  물론 모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피해야 할 것들도 있다. 영원한 약속이나 신성한 맹세, 엄숙한 기도 따위는 절대 저녁 무렵에 해서는 안 된다. 너무 감상적이어서 꿈 같이 이루어지는 탓에 현실적 실효성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녁 무렵에는 약속은 하되 웃고 넘길 수 있는 약속이어야 하며, 맹세는 하되 저녁 무렵을 넘기지 않는 맹세여야 하며, 기도는 하되 새들이 무사히 둥지에 들 수 있기를 바라는 어여쁜 사랑의 기도쯤이어야 한다.


  봄날의 어느 저녁 무렵, 작은 계집아이의 기도 소리를 나는 들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매우 또렷이 들렸다. 


  “하나님, 저기요. 저 내일 소풍가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김밥만 싸주고, 맛있는 과자는 안 사준데요. 그래서 하나님한테 부탁드리는데요, 우리 엄마가 맛있는 과자 많이많이 사주도록 말 좀 해주세요. 음, 그리고 또 요. 신발이 더러워 친구들이 놀려요. 그러니까 신발도 좀 사주게 말 좀 해주세요. 앞으로 공부도 잘하고, 엄마 말도 잘 들을게요…….”


  풀이 죽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작은 나뭇가지로 땅을 쓸며 말하는 계집아이의 기도 소리는 그런 내용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담배를 피우는 한 남자가 있었고, 그 기도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힐끗 소녀를 한번 쳐다보고는 슬며시 담배를 끄고는 갑자기 정면을 응시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여자아이와 전혀 관계없는 사색의 남자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조금 전 분명 같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남자의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언가 작심한 듯 갑자기 움직여 여자아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여자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껴안고 오던 길과 다른 길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집아이 귀에다 뭐라고 속삭이며 멀어져 갔다. 무슨 내용인지는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계집아이의 명랑한 웃음이 울려 퍼졌고, 그 수정 모빌소리 같은 명랑한 웃음소리는 분명히 자신의 기도가 받아들여진 웃음소리였다. 순간, 황혼과 함께 나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낙조에 물든 저녁 무렵에 사랑과 정의 풍경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신을 인정하고 또 경의를 표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런 때에는 감히 신도 친구로 삼을 수 있다. 아니, 그 무릎 아래에서 깊은 경의를 표할 수도 있다. 어떤 내용이건 작은 계집아이의 기도소리만큼은 틀림없이 들어줄 테니 말이다. 


  고향을 떠난 자로서 늘 그리워하는 고향은 우리 개개인의 고향이지만, 저녁 무렵은 언제 어디서건 우리 곁에 있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저녁 무렵이 우리 모두에게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마음을 주는 것은 이런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온 고향을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저녁 무렵을 말하는 자는 드물다. 저녁 무렵은 머나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심장처럼 뛰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하루하루의 일과 중에 매번 심장의 뛰는 소리를 듣고 있겠는가! 심지어는 한해 한해의 경과가 지나가도 마찬가지이다. 중추적인 혜택을 받고 있을지언정 익숙해진 것에 대한 무관심의 태도를 지니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시인이나 의사와 같은 특정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만 비로소 심장은 이야기된다. 그렇듯이 저녁 무렵도 이와 유사한 경과로 잊혀있는 것이다. 

  다행히 저녁 무렵은 잊혀도 설움 없이 태평이다. 심장은 더러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상처받을 일 없는 저녁 무렵은 그 기력을 전혀 잃지 않는다. 어떤 원망도, 어떤 배척도 없이 평화로울 뿐이다. 단지, 나그네에 있어서는 눈물의 시련이다. 걸핏하면 타지에서 방랑하거나 홀로 기거하는 나에게 그것은 틀림없다. 




  스쳐 지나는 마을과 마을의 저녁 풍경은,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품과 같다. 마을을 감싸 안은 연무를 비롯하여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기 굽는 냄새, 즐거운 새떼들의 지저귐, 그리고 따뜻한 안방의 반짝이는 텔레비전 앞에서 옹기종기 저녁을 먹는 가족의 풍경을 온화하게 펼쳐 놓고 있다. 그러한 풍경을 그리움만으로 훔쳐보는 나는 나의 한없는 고독에 기대어 풀 죽고 만다. 속절없이 눈시울에 젖는다. 저녁 무렵을 원망할 수가 없다. 오직 나를 나무랄 뿐이고, 불현듯 삶에 진지한 염원을 품으며 경건해진다. 

  그 후에는 이상하리만치 어김없이 집이 떠오르고 공중전화기를 찾는다. 이내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지금 어디 있는데? 밥은 먹었어?” 


  이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묵시적 호소가 기적소리처럼 마음을 울린다. 걱정하지 말라는 무뚝뚝한 나의 대답에 아무도 모르는 애수가 흐르고, 향수가 흐른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집 쪽을 향한 길을 바삐 걷고 있다. [끝]



[사진출처] ALL PIXBAY -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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