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세이 [문밖의 순수] / 고운하
인적이 없어야 했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부딪힘 없는, 깨지지 않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행동과 생각들을 가질 수 있는 그런 나의 자유의 공간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너무 불편한 것도 성가신 일. 인적이 들 만한 곳이 아닌 깊은 숲에 들었으나 언제라도 수월하게 문명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애써 찾은 만큼 역시 마음에 드는 둥지였다. 사방이 에메랄드 같은 푸른빛이 감돌고, 빛은 우듬지 사이로 아기의 반짝이는 눈빛처럼 내려왔다. 실개울은 아침의 참새처럼 조잘대고, 진짜 새 소리는 저쪽 어디선가 피콜로를 불며 골목길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즐거운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스며들었는지 솟아올랐는지 땅의 피부와 부드럽게 연결된 평편한 바위에 앉았더니 유난스럽게 힘이 있는 중력이 나를 끌어 일체화시킨다. 든든함이 몸을 감싸는 것 같아 휘파람 같은 기쁨이 터진다.
나의 일상은 이렇게 자연에서 흐름을 갖는다. 나로서는 이런 행보를 하는 것이 옳았고, 이것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미약한 존재로서의 상실감이나 우울의 소요를 잠재우는 안전한 선택이자, 내 존재의 형태를 목적과 가치 있는 조형물로 빚어내는 일이다.
고등학교 1년 수료를 끝으로 교육을 마감한 나는, 나의 지식이나 지혜로서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이 사실만으로 나를 설명하자면, 나는 그저 단세포 아메바와 같은 생육 물질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무언가의 행위나 가치를 갖겠지만, 삶이라는 유기적인 행태를 지닌 인간이라는 점에서 마땅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다른 동물에 발달치 않은 전두엽, 해마, 대뇌피질 등의 뇌 조직을 가진, 그래서 무궁한 자의식을 갖고 감정을 발현시키는 ‘인간인 나’여야 하고, 또 그런 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 탓인지 지식이나 지혜가 모자라는 것에 대한 한탄을 갖지 아니하고, 대신 나의 신경세포에 의해 자연선택으로 작용하는 감각과 관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인간인 ‘나’를 일깨우고 있다.
나를 ‘나’로 만드는 감각과 관념은 그 색이 투명하여 잡히지 않는, 그러나 무한의 세계를 나타내는 이상, 환상, 상상, 몽상과 같다. 그러한 상태는 나의 의식을 천공처럼 펼쳐놓고 사물의 세계를 관조케 한다. 관조하는 마음인지라 대체로 나의 삶이나 인생에 뚜렷한 지각이 없다. 늘 바람처럼 떠도는 의식으로, 주로 세상사의 신기하고도 신비한 행태에 매혹되거나, 빛과 색의 정서로부터 마음의 작용을 갖거나, 인간 사회의 행실에 웃거나 근심하거나 소망하는 마음에 젖어 지낸다. 진솔해야 한다거나 현실 감각이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삶의 통념으로 보자면 절대 성실한 행태는 아니다. 사뭇 이상한 성향을 가지고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나는 나를 순수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 나의 대뇌피질은 이미 오래전부터 독자적 삶 쪽으로 훈련되었고, 이제는 거의 습성화된 탓이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을 끌어안았다. 자연 속의 철새가 되고, 나뭇잎이 되고, 구름과 안개가 되고, 자갈처럼 구르다가 모래처럼 반짝이는, 이 밖의 모든 행태를 내 삶의 길로 여기며 살아왔다.
나의 삶에 있어 자연에 동화된 세월이 길다. 어쩌면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의 아들이었으리라.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강바람 몰려오고 미루나무 굽어보는, 또 올빼미 소리 울리는 자연의 태반인 까닭이다.
어차피 우리는 자연의 자식들이다. 부모의 태반을 통해 태어났지만 자연 체계에서 형성된 단세포, 미토콘드리아, DNA, 다세포로의 변이, 진화와 같은 생리적 경과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심신과 삶에 있어 자연이라는 맥락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자연의 근원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초근목피의 단출한 삶이지만 행복보다 더욱 안전한 만족을 자연에서 얻고 있다. 현대 사회의 눈으로 보자면 이상한 삶의 은둔자이기는 하지만, 「히키코모리」와 같은 어둠과 우울의 총아인 존재로 시간을 낭비한다거나 향락적인 자극에 취해 시간을 썩히고 있지는 않다. 하루의 일상은 순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며, 문밖에 나가면 인사도 즐겁게 하며 다닌다. 다만 사람과의 소통이 거의 없으니, 나의 인사 대상은 자연의 물상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무와 찔레꽃에게 인사하고, 물결과 피라미에게 인사하고, 박새와 산토끼에게 인사하는 식이다. 새벽안개나 저녁노을에도, 산들바람과 눈송이에도, 나를 쉽게 건네게 해주는 징검다리나 심지어는 외로운 무덤에도 인사를 한다.
그런 인사는 언제나 즐겁다. 그들과의 이해관계가 자유로워 무한한 정감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사들은 현대 사회의 노숙자이면서도 만족에 다다른 마음으로 사는 이유이자, 내 삶의 보석이다.
이 책은 문밖의 순수한 물상들과 그런 인사를 스치면서 떠올린 소소한 꿈, 상념, 사유 등의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이다. 필자인 나의 인생과 삶은 중요치 않다. 다만 자연을 향한 시선과 마음으로 이 책을 꾸몄으니, 이로써 당신의 세계가 조금만이라도 풀리거나, 새로움을 갖거나, 확장 되었으면 하는 염원이 있다. 그러면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