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 [색의 길] 중에서
청량한 가을의 정경에 따라 곡들이 선정되었음을 느낀다. 연주되는 곡들은 죄다 수정처럼 밝은 빛을 반사하고 실개울처럼 자잘한 여울의 소리를 낸다. 가볍고 명랑한 시간이다. 아주 순하게 즐거움의 분위기를 타며 감미로움에 몸의 감각이 살푼살푼 흔들린다. 저 앞 중년 부인의 팔이 손자의 팔을 잡고 너울거리고, 팔짱을 끼고 앉은 애정 깊은 연인들의 상체가 부드럽게 파도치고, 친구 사이인 듯 다정하게 붙어 앉은 두 명의 젊은 여성들도 그렇다. 사실 여기저기 그런 모습이 보인다. 가을에 걸맞은 곡의 감정과 악기들의 감정이 누구나 감미롭게 흔들릴 만한 요람이 된다. 절대 깨치고 싶지 않은 순수한 서정이다.
자연에 동화된 작은 노천무대에서 펼쳐지는 소박한 클래식 콘서트의 분위기다. 청중으로 앉은 모두에게 낭만의 추억이 소나무 향처럼 짙게 농축되고 있는 시간이다. 살아가면서 이런 시간의 경험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작심한 뒤 전국의 공연 안내장을 거머쥐고 뛰어다니지 않는 한 말이다. 그래서 청중으로 앉은 이 시간이 귀한 시간이기도 하다.
사방이 활짝 열려 누구나 원하면 언제든지 청중이 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청중으로 앉았다는 것은 앉은 사람들의 선택이다. 저마다 다를, 앉을 당시의 마음을 알 길은 없다. 무작위의 사람들이 왕래하는 관광지인 탓에 온갖 복잡다단한 마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돈 아까운 줄 몰라도 되는 무료이다. 결국 이곳 노천 공연장에서의 청중은 시작과 끝이 없는 유동의 공기처럼 스며있는 셈이다.
긴장은 공연자들만의 몫이리라. 공연자들은 공기의 흐름을 솜사탕처럼 뭉쳐야 한다. 가을과 흥에 맞는 선곡, 노련한 음정 구사, 즐거운 멘트나 퍼포먼스 등으로 청중의 감정을 환희로 물들여야 한다. 그 어느 하나라도 변성이 뾰루지처럼 튀어나와 버리는 순간 청중의 감정은 냉담해진다. 해산이 시작되는 것이다. 휑하니 뚫린, 관광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만이 내왕하고 있는 길목의 노천 공연장에서는 더더욱 그렇게 된다.
청중의 한 사람으로 앉아 있지만, 깊고 세밀한 사념을 즐겨하는 나는 그런 긴장을 낚아채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시종일관 좋은 공연이다. 공연자들의 뛰어난 능력과 성심으로부터 좋은 음정들이 흘러나와 환경에 걸맞은 흐름과 분위기를 잘 이끌고 있다. 바이올린은 산들바람을 불러일으키고, 플롯은 휘파람새를 날려 보낸다. 청중들의 몸이 절로 반응한다. 들꽃처럼 하늘거리고, 모빌처럼 웃고, 윤슬처럼 손뼉을 친다. 순수의 서정이 꿈결처럼 나타나는 곳,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낙원이다.
그러나 …….
애석하게도 낙원은 순간적인 꿈결 속에만 있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알았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나야 하고, 현실의 옳거나 그른 이해관계와 당면해야 한다. 결국 그런 일이 발생한다.
공연의 분위기를 떠나 주말의 관광지 풍경을 떠올려보라. 관광지의 노천무대여서 공연의 주변은 어쩔 수 없이 어수선하다. 끊임없이 오가는 보행자들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무심하게 지나가고, 어떤 이는 기웃거리다 떠나가고, 어떤 이는 잠시 조용히 서서 한 파트 연주의 청중이 되어준 후 떠나기도 한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또 어떤 이는 여정의 백미를 발견한 듯 기뻐하며 가족 모두를 청중으로 앉힌다. 이런 이로 인해 공연자의 정력이 목에서도 나타나고 팔에서도 나타난다. 플롯의 취관에 드는 바람과 바이올린 현을 긁는 활에 더욱 농담이 더해진다.
어느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무대 위의 공연자는 홀로된 환경에서 공연하는 것보다도 관객이 있는 환경에서 더욱 좋은 공연의 성과를 이룬다고 한다. 심증만으로도 알 듯 한 일인데, 연구까지 했던 모양이다. 이런 사실이 있는 만큼, 공연 중일지라도 한 사람 두 사람 청중으로 관람석에 앉는 이들이 더없이 반갑다. 이곳 모두의 흥과 감정이 부흥하여 나에게까지 오는 까닭이다. 딱 여기까지라면 좋겠다. 그런데 아니 되는 것이다. 역시 인간 세상은 고르지가 않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공연은 부풀어 있다. 흐트러진 음정이 없는 멋진 소프라노의 성악이다. 타고난 목소리를 다듬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기에 저토록 음정이 정갈할까! 모남이 없고 순결하다. 세공된 보석을 쉬 깨칠 수 없는 것처럼 차마 깨칠 수 없는 순수의 법칙을 두르고 있다. 절로 외경심이 일어나는 지경이다. 이런 경지에 대한 예의는 본능에 의해서건 교육에 의해서건 우리 내면의 양식으로 저절로 풀려나올 나올 일이다. 이런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축생과 어찌 다를까.
차이콥스키의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가 흐르는 「더 콘서트」라는 음악영화가 있다. 장면 중에 지휘자가 당의 유대교 배척 지시에 불복했다고 열연 중에 지휘봉을 빼앗아 ‘탁!’ 꺾어버리는 공산 권력의 횡포 장면이 있다. 인간다움을 개념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이런 장면에서 틀림없이 어둠의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는 행동임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랑, 평화, 행복, 인류의 존속을 위한다면 인간성 위에 그 무엇을 올려서는 안 된다. 욕망도 낮추고, 권력도 낮추고, 꿈도 낮추고, 자기도 낮추어 조화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 예의도 그 일환이다. 그런데…….
역시 낙원의 꿈결이 영영 지탱될 천명이란 없나 보다. 어둠이 나타난다. 열창의 면전에서 갑자기 불쑥 일어나는 중년 남녀가 있다. 그리고 감미로움에 도취된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뚫고 나가 장내를 어수선하게 만들고 만다. 그들의 모습은 틀림없이 공연 분위기를 ‘쫙!’ 찢고 만다.
무엇이 저들을 열창의 면전에서 일어서게 했는지는 모른다. 어떤 연유로 자리를 뜰 때는 뜨더라도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공연자에 걸림이 되지 않을 막간이 있지 않은가! 갑작스럽게 생겨버린 아주 급한 사정이어서 이해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있기엔 저들의 행동이 너무 천연덕스럽다. 급한 기미도 없고 미안한 기색도 없다. 그저 자신들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을 뿐이라는 듯 주섬주섬 일어나서 엉덩이도 털고 배낭도 고쳐 매며 어슬렁거리듯 장내를 빠져나간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무례한 모습이다. 내 마음도 그렇듯이 청중은 청중대로 흐려지는 분위기에 눈살 찌푸려지고, 공연자는 공연자대로 자기 가창이 매력 없나 싶어 맥이 풀리리라.
그 마음 알 수는 없으나, 다행스럽게도 성악가의 음정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프로답게 정신을 다잡고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내 마음속에서는 결국 소프라노의 멋진 성악이 흔들리고 말았다. 이 사실이 오직 내 마음만의 진동일까? 아닐 것이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자리를 이탈하는 두 사람에 쏠리고,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이탈이 주옥같이 부드러운 물결의 공연에 크고 작은 칼칼한 파문을 일으켰음이 분명하다. 중년 남녀의 무례는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며, 인간과 사회적 관계에 불편과 근심을 던지는 일이다.
공연의 분위기를 배려하는 작은 예의 하나 지키는 것, 막간을 이용해 자리를 뜨는 자세를 갖추는 일에 교육이 필요한 것일까? 이 공연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 소소한 작은 예의들이 있고, 우리는 그 작은 예의들로 인해 친교의 선의를 갖는다. 인간성의 본질이 되는 그 참다운 성향 말이다.
스스로 배워보자. 조금만 생각을 더 하면 절로 마음에서 일어날 예의의 덕성이다. 사물을 존중하는 지성, 상황을 살펴 행동하는 지혜, 사후의 흔적에 남겨질 평론을 생각하는 이성. 이런 자세들에 대한 생각과 한없이 화해하자. 그래서 이 청량한 가을 속이 아름다운 공연이 모든 청중에게 영원한 낙원처럼 추억될 수 있도록 하는 미덕을 펼쳐보자. 감정이 솜 구멍처럼 열려있고, 흥이 고인 상태의 시간. 모두에게 얼마나 귀하고 좋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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