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니 꽃들이 마구 피어난다. 담장 안팎으로 첩첩만첩 꽃들의 시간이다. 사람의 마음에 요동이 있을 수밖에 없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난 따사로운 마음이 담장 넘어 들판을 훑더니 결국 상춘객이 된다. 먼 길의 여로를 갖는 상춘객이 아니라 고무신 신고 산책을 하는 상춘객이다.
그렇게 갈 수 있는 멋진 곳이 집 근처에 있기도 하다. 수려한 강산에 힘입어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수승대]라는 명승지다. 명승지인 탓에 조경도 녹록치 않다. 길이면 길, 화단이면 화단, 공원이면 공원, 요소요소에 맞춤옷을 입히듯 벚나무, 개나리, 조팝나무 등을 알맞게 심어놓았다. 해마다 봄이면 이것들이 앞 다퉈 피면서 만화경을 이뤄놓는다. 꽃구경을 작심한 이 사람 저 사람이 아니 몰려들 수 없다. 저마다 화첩을 품기로 작정을 한 듯 꽃 곁에 서서 순간의 멋과 기쁨을 새긴다. 그 얼굴들에 무상한 회색 돌랴. 너와 나 온통 꽃물 들어 화색이다.
올해도 똑같다. 슬금슬금 걸어 드니 온통 화색이다. 그런데 나는 화색이 아니다. 그들 무리에 섞이지도 않는다. 꽃구경이 아닌 봄기운에 떠나온 것인 데다가 혼자인 탓에 벚나무 아래 서기도 멋쩍고 개나리 곁에 앉기도 멋쩍은 신세여서다. 나는 애당초 이 현실을 알고 있기에 솔솔바람처럼 인파 사이를 가볍게 빠져나와 외진 곳을 찾는 선택을 했다. 그리하여 금세 사람들이 아니 드는 호젓한 하천변 흰 바위 위에 고요한 섬처럼 앉아 있다. 이러한 나의 색은 회색도 아니요, 화색도 아니요. 무색이다. 그저 고요히 평화롭게 봄의 정경을 바라보고 있는, 웃음을 띨락 말락 한 미소 같은 무색이다.
바로 건너편에는 잘 닦인 하천의 벚꽃길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왕성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관조적인 내 시선으로 인해 현실의 작태로 보이지 않고 시공간을 넘은 세계의 영상으로 전개된다. 저마다 봄나들이 취한 그들의 명랑한 행동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연출이 되어 참, 사람 살만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어떤 동행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작태는 이내 나의 관념을 지배하는 연출의 중심이 되었다. 짝짝이 또는 삼삼오오로 지나가는 대다수가 화색에 물들어 즐거운 분위기인데, 이 커플은 발견 때부터 무언가 색다른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기에 특별히 눈에 들 수밖에 없다.
30대 연령으로 보이는 남녀 중 남자는 약간 마른 체구에 이제 막 기르기 시작한 듯한 옅은 구레나룻 수염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차분하고 생각이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얼굴형이다. 그에 비해 여자는 키가 작고 약간 통통한 편인데 머리를 뒤로 묶고 있어 문득 조선의 여인상을 생각나게 한다.
둘은 전체적으로 옷차림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렇고 수수한 느낌이다. 나쁜 느낌은 아니지만 당장에 드리우고 있는 봄의 화사함을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처지는 느낌인데, 특히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발견 때부터 둘 사이에 좀처럼 다정한 감이 없다는 점이다. 딱 지적하자면 시종일관 남자는 앞서 걷고 여자는 서너 걸음 뒤에서 졸졸 따라가는 사뭇 이상스러운 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떨어져 있으니 대화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저들이 특히 눈에 든 것은 영락없는 나의 아버지 어머니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나들이할 때 보면, 아버지는 등 뒤에 남은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듯 절대 돌아보지도 않고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어머니는 그저 앞 세상이 오로지 아버지뿐인 듯 아버지 꽁무니만을 열심히 졸졸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 탓에 걸음이 작은 나만 둘 사이에서 고생하곤 했다. 아버지의 무심한 그런 모습 때문인지 나는 도통 아버지와 친해지지 못했고, 끝까지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눈 적 없이 이별을 갖고 말았다.
여자가 뒤에 따라오건 말건 저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남자도 아버지처럼 그렇게 자기 심혼만을 갖고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도대체 둘이 왜 봄나들이를 나왔나 싶다. 혹 남자는 마지못해 나왔을까?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나오게 되었건 이왕 나온 것, 이 좋은 봄날에 저 미아 같은 여자를 좀 챙겨 다정히 걸어 줄 수 있는 일 아닌가!
한 번도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린 적이 없어 여자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자는 둘 사이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르게 분명 봄과 꽃구경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무성한 벚꽃을 향해 얼굴을 드는 것도 보이고, 조팝나무꽃 흰 무리에 다가서기도 하고, 봄까치꽃이나 제비꽃이라도 보았는지 땅을 향해 허리를 굽히기도 한다. 그러다가 너무 뒤처진다 싶으면 종종걸음으로 무심히 앞만 보고 걷고 있는 남자를 따라붙는다.
나름대로 자유로운 모습인데, 저런 것을 보면 둘 사이에 무슨 불편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저 남자만 뒤돌아봐 주고, 지켜봐 주고, 곁에 나란히 서주고,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주면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다워질 것 같다. 봄꽃들을 대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 여자도 분명 그것을 바라는 듯한 느낌인데 말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연도 모르고 여자의 마음도 모른다. 다만 모든 이들의 화색 얼굴처럼 둘 사이에도 다정한 화색이 피어났으면 하는 갈망이 신성한 기도처럼 일어난다. 그러나 사뭇 긴 하천길이 끝나가도록 둘 사이의 간격은 끝끝내 좁혀지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하나하나의 꽃들에서, 풍경에서, 봄기운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여자의 아기자기한 모습은 자꾸만 예쁘게 여겨진다. 그러나 저 예쁜 모습은 무심한 남자로부터 버려져 있다. 이렇게 되자 너무 무심한 남자의 태도에 내가 안달이 나는 지경이 된다. 가슴을 간질이던 봄의 평화가 속절없이 깨지고, 열불에 보골보골 끓어오르는 이상 징후가 아니 일어날 수가 없다. 이 좋은 봄날에 말이다.
[사진] ALL PIXBAY -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