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세이
몹시도 매혹적이어서 사시사철 종종 가는 장소가 있다. 언제나 그대로 있는 장소이고, 좋은 감성을 얻는 장소이다. 계절로 인한 채색의 변화가 있고, 그에 따른 감성의 변화는 있어도 인적에 의한 변화는 전혀 없다. 들르자마자 가장 먼저 커피 한잔에 매료되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자유로운 안식의 기쁨이 치솟는 상황이어선지 커피가 유달리 맛나기 때문이다. 천연의 장소인 탓에 무궁한 묘리를 가진 자연의 핵산 가루가 커피 속에 뿌려지는 것 같다고 여긴 적도 있다. 그곳에서의 커피 맛은 그렇게 달콤하다.
그 장소는 내 성향에 있어 사랑의 섬광이 터지는 얼굴 같았다. 속절없이 좋아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맑게 흐르는 실개울, 풀벌레나 새들의 소리, 또는 은둔, 신성, 권태 따위들이 모두 적절하여 만사태평을 이룬다고나 할까. 온종일 한순간에도 평화로움을 놓치지 않는 곳이다. 그 장소는 남덕유산의 어느 골짜기 품에 있다.
십리길 거리에 있는 내 시골 거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곳을 사랑하여 꽤나 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물론 오두막을 짓고, 솥을 걸고, 탁자를 놓은 무슨 살림살이를 채비한 것은 아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내 조국의 땅에 관한한 그 어느 곳이건 ‘자산’과 ‘소유’라는 불가침조약이 맺어지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상호간의 약속이요, 사회적 질서로 삼아 마치 천국을 이룬 양 내심 만족하고 있다. 이 만족을 깨트렸다가는 죽사발을 당할 일이다. ‘자유’라는 공허한 외침 외에 항변할 이유도 마땅치 않고 보면, 내 조국의 숲 속은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닌 한 그저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떠나오는 것이 최상이다.
나만의 비밀정원이라고 여기는 장소지만, 항상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홀연한 나그네의 족적만 남기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커피를 위해 물을 끓일 작은 도구나 커피 잔을 지참하고 가기는 한다. 허기를 채울 빵이나 책, 노트 등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작은 이동성 물질들이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주인인 척 할 염려는 없다. 그 장소엔 결코 나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 장소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겉으로 보아 극히 단조롭다. 다양성 속에서 복잡하게 사는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저 ‘심심한 곳’이라거나 ‘시간낭비’라는 지탄을 받기에 딱 알맞다. 실제로 하루 동안 이곳에 있을 때 내가 하는 일이란, 도착하면 심호흡 한번 크게 내쉬고, 졸졸 흐르는 물결에 손을 한번 적신 뒤 커피를 타고, 그리곤 깨끗한 돌 위에 앉아 몽상과 사유를 즐기는 일. 문득 유성처럼 돋보이는 사유가 생기면 노트에 적는 일, 이윽고 배가 고파서 빵으로 허기를 달랜 뒤 느긋이 두 잔, 또는 세 잔째의 커피를 마시는 일. 때로는 잠깐 솔잎 깔린 평지에 드러누워 수면을 즐기는 일. 이런 행위가 거의 전부이다.
주변을 둘러보는 일도 당연하다. 낙엽송, 팥배나무, 고추나무, 개다래덩굴 등 몇몇은 낯익어 정들었고, 그밖에도 말없이 생존과 생명의 가치를 일러주는 무수한 식물들이 있다. 해마다 틀림없이 새싹이나 새순의 태동에서 낙엽의 소멸까지, 또 앙상한 가지로 꿈꾸는 겨울을 보내는, 그러한 온전한 생명의 순환을 나타내는 식물들을 볼 때마다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다.
식물들에게는 ‘교육’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생애를 치룰 수 있는 필요한 모든 것들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행동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식물들이 자동차를 몰아 은행을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과학적 기술과 금전이 없어도 그들의 사회는 무리지어 번창한다. 오직 제 자리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그들은 종족번식을 하고, 세과이어 나무처럼 몇 십 미터를 자라기도 하고, 강철소나무처럼 몇 천 년을 살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이런저런 사고의 소식을 접한 뒤 금방 삶의 위태로움과 두려움을 겪는 현대인으로서 그 발견은 틀림없이 기적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무리일지라도, 최소한 어떤 교훈은 얻는 것이다.
호흡은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명목 중의 하나이다. 나는 좁은 콧구멍을 지녔거나 작은 폐를 지니고 태어나선지 입을 벌리고 숨 쉬는 습성이 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코로 숨 쉬는 누구보다도 많은 세균이나 중금속 물질을 들이마셨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신기할 정도로 건강하다. 가난한 홀몸의 삶을 지닌 자로서 음식, 운동, 영양제 복용이라던가 하는 몸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말이다.
건강한 이유는 딱 하나다. 약초꾼으로서 해맑은 공기의 전당인 숲에 있다는 것! 그 연장선상으로 이렇게 해맑은 정다운 장소를 두고 있다는 것! 이것은 마치 잘 꿰어진 조화의 섭리 같다. 만약 내가 입을 벌리지 않는 습성의 인간이었다면 숲과 그 장소는 나와 무관한 것이었을지 모르리라. 그런 생각을 분명 해보았다. ‘죽으란 법이 없다.’라는 말이 달리 있을까 싶다. 물론 나의 이 운명적 사실은 숲에서의 잎사귀 한 장 마냥 부수적인 일이다.
숲 속의 내 장소에 있는 한 단조로운 것은 없다. 심심한 순간에도 몸은 건강하게 빛나며, 시간낭비 속에서도 정신은 선하게 빛난다.
꿈꾸듯 앉아있게 되는 그 장소에서는 졸음도 쉽게 온다. 하루 중 어느 순간은 결국 한숨 자고 있다. 잠은 나뭇잎을 스치는 공기의 감미로움과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속삭임 속에서 취한다. 어머니의 자장가와 손길에 잠드는 아기의 모습처럼 지극한 평화와 행복이 있다. 그동안 ‘피톤치드’는 삶에 지친 나의 말초신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있고, 두 손을 모아 들이킨 해맑은 시냇물은 나의 세포조직에 달콤한 양분을 분양하고 있다.
숲 속의 그 장소에서는 그렇게 수면 중에도 삶을 북돋우는 보람이 자란다. 보람은 충직한 하인 같이 인생을 돕고, 삶을 돕는다. 곤욕스러운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빈곤한 내가 삶의 의욕을 갖는 곳도 숲 속의 그 장소이다. 좀처럼 없는 희망이 살아나는 곳도 숲 속의 그 장소이며, 그래서 나를 포근히 잠들 수 있게 하는 곳도 숲 속의 그 장소이다. 커피 맛이 유난히 달콤한 곳일 수밖에 없다. 당신에게도 한 곳쯤 꼭 가지라고 권하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