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미래과거시제'
학창 시절, 영어를 공부할 때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시제였다. 현재면 현재고, 과거면 과거지 거기서 진행과 완료를 나눌 건 또 뭐람. 시제를 묻는 문제를 만날 때면 눈을 가린 채로 평균대에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위에서 나는 지금 머무르고 있을까? 혹은 아직 이동 중? 글쎄, 이미 도착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문제를 틀린다면 나는 발을 잘못 딛고 그대로 추락할 것이다. 물론 정확히는 나의 등급이 떨어지는 거겠지만.
여하튼 그중 나를 가장 머리 아프게 했던 것은 바로 ‘미래완료시제’였다. 이 시제는 과거/현재 시점에 시작된 일이 미래의 특정 시점까지 이어질 경우를 나타낸다고 한다. 구문으로는 ‘Will have p.p’로 표현할 수 있다. 특이한 구문이었다. 이 짧은 구문 안에 과거(p.p), 현재(have), 미래(Will)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니. 어차피 ‘~할 것이다’, ’ ~하게 될 것이다’, ‘~하였을 것이다’ 정도로 해석될 거라면 그냥 ‘Will’ 하나로 퉁칠 것이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위해 복잡함을 감수해야 하는 걸까.
결국 내가 내렸던 결론은 미래완료시제가 단순히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을 예상하고 쓰이는 시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래완료시제는 현재 시점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어떤 일의 결말을 예측하는 데 보통 쓰인다. 다시 말해 이 시제로 미래를 이야기할 땐 나름대로 타당한 추론의 과정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를 통해 미래에 대한 확신과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동사 ‘Will’에는 미래에 대한 개념뿐만 아니라 그 단어를 사용하는 화자의 확신과 의지도 함께 담겨 있다. 미래는 과거나 현재에 비해 근거가 부족하다. 현재는 과거에게, 과거는 더 먼 과거로부터 어떤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적인 근거를 얻는다. 이미 발생했거나, 발생 중인 일이니 다른 결말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단순히 경험만으로는 미래의 일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아직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는 그 부족한 근거를 확신과 의지를 통해 보충한다.
그렇다면 미래를 과거처럼 말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강한 확신과 의지가 필요할까.
배명훈 작가의 단편 소설 <미래과거시제>에서 주인공 은경은 우연한 계기로 튀르키예인 교수의 언어학 강의를 수강한다. 교수는 ‘-아닼-(-adak-)’, ‘-에뎈-(-edek-)’라는 튀르키예어의 독특한 시제 어미를 설명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어미는 화자가 과거시제로 말할 때만큼의 경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만 사용된다고 한다. 그 말에 그녀는 대학시절 만났던, ‘-암-/-엄-’ 같은 어미를 쓰며 미래의 일을 과거처럼 말하던 독특한 말버릇을 갖고 있던,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마법처럼 사라져버린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린다.
시간의 질량은 절대적으로 동일하지만 밀도는 다르다. 오늘이 벌써 4월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2023년이 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개월이 지났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남은 9개월이 막막하게 느껴져 한숨을 쉰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건 우리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느끼는 시간의 밀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렇듯 똑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처한 상황이나 시점에 따라 인식하는 시간의 밀도는 달라진다.
그렇다면 사람 간에 시간은 어떠할까. 최소한 지구와 화성만큼의 밀도 차가 존재할 것이다. 가령 오늘 출근을 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길게 느껴지겠지만, 휴가인 사람에게 하루는 무척 짧을 것이다. 혹은 아침과 새벽을 나누는 것으로도 시간의 밀도 차를 확인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오전 7시를 기점으로 아침과 새벽이 나뉜다. 반면 다른 누군가에게 오전 7시는 여전히 새벽일 것이다. 혹자는 오전 6시를 기점으로 아침과 새벽을 나눌 수도 있다.
이러한 시간의 밀도 차로 인해 각자의 시간은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른다. 사랑이라는 건 다른 속도의 시간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시간 속으로 내가 들어가야 한다. 혹은 나의 시간 안으로 상대를 들여야 한다.
작중 은경은 은신과 재회하기 위해 일주일 전과 똑같은 요일, 똑같은 시간에 그를 만났던 계단을 찾아갔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두 사람은 학교 축제에서 재회하는데 그때 은신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일상 속 평범한 행동들을 서로 다른 속도로 마임 하며 자신의 시간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조절했다. 은경은 그 공연의 유일한 관객이 되어 그의 시간을 함께 했다. 강은신의 시간 안에 김은경이 들어간 것이다. 이후 뒤늦게 은경의 마음을 눈치챈 은신 역시 그녀의 시간 속으로 들어서며 마치 봄꽃처럼 무더기로 자신의 사랑을 피워냈다.
“그 대신 두 사람은 턴을 주고받았다. 때로는 은경이 1인칭이 되어 강은신의 몸을 구석구석 파고들었고 다음 턴에는 강은신이 1인칭이 되어 자신을 지운 채 은경의 몸을 집요하게 탐험했다. 그리고 그 ‘턴을 주고받는’ 행위라는 것은 마치 둘이 함께 춤을 추듯 경쾌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p.109”
서로의 시간을 번갈아 방문하며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공고히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을 맞춘다는 건 대단한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만약 한쪽이라도 균형을 잃는 순간 사랑은 시간의 속도 차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간다.
은경과 은신이 헤어진 이유도 시차에 있었다. 작중 은경은 2차원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시간은 언제나 뒤에서 앞으로 흘렀다. 반면 시간여행자인 은신의 시간은 3차원의 구 형태였다. 그 속을 꿰차고 있는 은신에게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슬프게도 은경은 그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은신의 미래과거시제를 단순한 말실수나 독특한 말버릇 정도로 여겼듯이 은경은 은신의 시간 속에 자주 들어갔으나 그 시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리라 짐작만 할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시간)에는 균열이 생겼고, 시간여행자로서 규칙을 지켜야 했던 은신은 결국 은경을 떠났다.
위에서 소개한 <미래과거시제> 외에도 8편의 단편 소설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말 차단을 위해 파열음이 사라진 세계를 다룬 <차카타파의 열망>과 사고로 몸의 절반이 기계로 대체된 여자를 소재로 한 <절반의 존재>가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단편이었던 <알람이 울리면>도 좋았다. 특히 작중 아내가 ‘나’에게 남겼던 마지막 한 마디는 근래 읽었던 소설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이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 작품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반복된다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를테면 <미래과거시제>에서 첫사랑을 찾아다니던 김은경은 <접히는 신들>에서는 신들린 종이접기 실력을 가진 천재로 등장한다. 물론 이름만 같을 뿐 동일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이 같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9편의 단편은 콜라주처럼 한데 모여 거대하고 느슨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그 세계의 한 귀퉁이에서 김은경은 사라졌던 강은신과 재회할 수 있을까. 무려 15년 만에 김은경은 다시 강은신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지? 모든 시간이 한 방향으로 단조롭게 흐리지만은 않았다는 거.” 그녀의 물음에 튀르키예인 교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 대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작정이다. 확신과 의지를 가지고 튀르키예에서 한국으로, 15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도착한 그녀가 마주한 건 무엇이었을까. 과거일까. 미래일까. 답은 책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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