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9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우리가 헤어지던 날을 떠올렸다.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어. 지난번에 네게 전해주지 못했던 선물을 이번엔 꼭 챙겨두었어. 이걸 받은 네가 얼마나 기뻐할지를 생각하면서. 요 며칠 간 목소리가 어두웠던 너를 생각하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별 문제는 아닐 거라 생각했어. 그냥 회사일이 조금 힘든가 보다. 여행도 앞두고 있으니 예민할 수 있겠지. 가서 내가 다독이고 위로해주면 다시 밝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너는 내게 이별을 알리는 편지를 건넸다. 웃기게도 1400일을 기념하는 편지였는데도 말야. "사랑을 가르쳐 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제 그만 해야할 것 같다."
너는 내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어. 하필이면 내가 신고 온 운동화가 네가 선물한 거라서 더 그랬을까. 오히려 울고 싶은 건 나였는데, 구슬프게 우는 너를 보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며 너의 곁에서 한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아니라, 붙잡을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네가 울고 있어서. 그 울음을 멈추게 할 방법을 나는 알지 못 해서. 네가 우는 이유가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서로를 붙잡으려는 시도도, 애처로운 마음의 자락도 내보이지 못했던 밋밋한 이별. 그저 마지막 포옹이 전부였던 이별. 우리의 이별은 그런 거였어. 그렇게 너는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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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 나의 세상은 무너졌다. 처음엔 이유를 생각했다. 너는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그러다 이별을 말하던 쪽은 늘 너였다는 우리의 지난 역사가 떠올랐고 이번엔 네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불편해 하는 것 같다는 애매모호한 말을 던져놓고 간 너를 이해하지 못 했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요 몇 주간, 심지어 내 부모님을 만나던 그 자리에서도 나와의 미래를 재단하고 있었을 너의 심보가 역겨웠다.
그러다 갑자기 네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또 그 놈의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면서. 너에게 문자하고 싶고, 전화하고 싶고, 만나고 싶은 마음에 애달파 하면서. 참지 못하고 너에게 연락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무서워졌다. 네가 나를 귀찮아하면 어쩔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짜로 끝일 텐데. 그럼 나는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오랜만에 우리는 만났다. 이별 후의 첫 만남. 우리는 함께 전시를 갔다. 불행이도 우리가 아직 연인이던 시절, 함께 가자고 했던 그 전시는 이미 끝이 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전시를 보았다. 전시를 보고나선 카페에 들렸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 그때 계속 불편했어. 처음엔 아직 우리가 연인이던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겠더라. 너는 이미 나를 잊었고, 우리는 그때로 다신 돌아갈 수 없으며, 너 역시 나를 조금은 귀찮아하고 있다는 걸. 나만 혼자 그 자리에 덩그라니 남아 지난 세월을 반복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어.
다시 시작할 순 없겠냐고 묻던 내게 너는 이렇게 말했지. '지금은 내가 밉고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고, 괜찮아질 거라고.' '모진 이별이지만 이 또한 모두 지나갈 거라고.'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게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는 그동안 이별을 차근차근 준비해왔던 너와는 달리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 두 번째는 이별이라는 건 헤어지자는 한 마디로 쉽게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 어린 가수의 노랫말처럼 바다처럼 깊은 우리의 사랑이 메마를 때까지, 그 긴 시간을 기다리는 과정이 모두 이별이라는 것. 그러니 너와는 달리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별을 하고 있는 중이야. 아직도 찰랑거리는 저 파도가 모두 부서져 메마른 모래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래서 나는 너를, 나의 세상에서 추방할 거야. 바다처럼 깊은 우리의 사랑이 메마른 땅이 될 때까진. 물론 언젠간 너와 다시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하지만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니까. 나는 너에게 잔인해지기로 마음먹었고, 그게 최선이라고 믿어. 설령 잘못되고 찌질한 방법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을 상처 입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멈추진 않을 거야. 이해해줘. 하루 아침에 세상이 무너져 버린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은 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으니까. 그거 말고 내가 달리 어떤 복수를 너에게 할 수 있겠니.
얼마 전엔 우연히 네가 다니는 회사 앞을 지나갔어. 걱정 마. 널 보러간 게 아니라 시상식 때문에 간 거니까. 사귈 땐 몰랐던 너네 회사 위치를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네. 웃기게도 이런 일이 참 많아. 왜 난 늘 이렇게 한 발짝 늦어야 하는 건지.
잘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너를 미워하는 것도 그만두진 않을 거야. 대신에 너도 나만큼이나 많이 아팠으면 좋겠어. 그러기를 기도할게.
그럼 안녕.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