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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필 Apr 25. 2022

쏟아내는 하루

몇일, 몇개월 간 축적된 정보가 하루에 쏟아지는 건에 대하여

이천 이십이년 사월 이십오일, 오늘 박수필 선생은 또다른 위업을 성취하였다. 근무일 이틀만에, 작성해야 하는 자료를, 마감 시간을 남기고 해 낸 것이다.


정황은 다음과 같다. 


목요일 오전 

급하게 자료를 작성해야 한다는 당위를 전달 받았다. 금요일은 휴가였다. 박수필 선생은 화요일에 그 자료를 유통해야 하는 시대적 책무가 있었다. 고로, 망할 줄 알았다. 꼼짝없이 금요일에 휴가지만 이걸 쓰고 있거나, 주말의 일부를 할애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을 진 채로 작업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 목요일은 회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박 선생에게 모자란 것은 시간이었다.


"아, 일단 써 보자" 생각하던 박 선생은 잔꾀를 굴리기 시작한다. 정황 상 디테일 한 이야기보다는 어른들의 안줏거리를 던져 주면 되는 일이었다. 필요한 내용은 대충 알고 있고, 남은 것은 구성이다. 이때 박 선생을 구한 것은 평소에 적어두고 글을 깨작이는 습관이었다. 글 타래로 던져놓은 수준의 것을 얼기설기 꺼냈다.


그 내용은 박 선생이 언젠가는 쓰겠지만, 이렇게 하면 일을 더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충 치워두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를 어쩐담. 이제는 꺼내야만 하는 시점이 찾아왔고, 당장 납기가 눈앞에 있다. 조급한 마음과 주말에 일하기 싫은 마음, 추가 근로를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에 박선생의 키보드와 마우스는 바빴다.


목요일 퇴근 무렵

키보드와 마우스가 휘갈긴 PPT를 보스에게 들고 간다. 보스와 생각의 방향은 달랐지만, 다르다고 해서 싸우고 관철할 틈이 없다. 박 선생은 야근을 하기 싫고, 주말에 일을 하는 것은 더욱 싫다. 이 자료의 본질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씹을 거리다. 그정도는 타협해도 된다. 애초에 깊이 있는 보고를 써야 했다면, "애플 퀄리티"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것이고, "형님, 그건 못하겠습니다"라고 배째라고 했을 터다. 


보스와의 타협점을 찾는다.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자료를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지점의 피드백만 받아낸다. 보스와의 신경전은 생각 외로 치열했다. 하지만 "어이구, 그런 것 까지 하면 기간 안에 유통을 못 합니다"라는 말 앞에 장사는 없다. 보스도 갈굴 사람이 박 선생 밖에는 없어서, 이내 포기한다.


변경할 보고서의 논리를 확정한다. 일부 재활용 할 것을 가져온다. 이제는 박 선생의 결단의 시간이다. 주말에 할까? 말까? 퇴근을 하고 회식자리로 이동하면서는,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금요일과 주말

전날 회식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일 생각 따위 할 틈이 없고 숙취에 시달렸다. 주말은 전통적으로 일하지 않기 때문에, 예정된 일정을 소화했다. 일요일 저녁 즈음에서야 "일을 좀 해 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박선생의 체력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월요일에 출근을 일찍 하겠다는 생각으로, 박선생은 일찍 잠을 청해본다. 아뿔싸. 유튜브는 재미있다.


그렇게 월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가까스로 일어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박 선생의 눈꺼풀은 몸무게 만큼이나 무겁다. 이미 주말에 확정지어 놓은 스토리라인, 구성만 좀 변경하면 된다. 다른 일을 제쳐 놓고 이 일에 전념한다면, (그리고 보스도 어느정도 타협할 것이므로) 귓등으로 들으며 일을 마무리하겠다는 계획이다. 출근했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춤을 추었다. 키보드는 가끔 탭댄스를 추었고, 마우스는 현란하게 움직였다. 퇴근 시간이 되었고 자료는 완성되었다.

기획자는 본인이 경험한 것 이상의 경험을 설계하지 못한다

위 코멘트는 일부 각색되긴 했지만, 여러 경험을 해보라는 옛 보스의 말이다. 많은 말을 했겠지만, 이 양반이 나에게 남긴 정수는 저 한마디다. 이날 박 선생의 기묘한 자료 작성에는, 평소에 생각 많고 이것 저것 해 본 것이 도움이 되었다. 경험하고 저장한 것이 없었다면 박 선생은 조금 더 일찍 드러누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 선생의 밥벌이도 어려워졌을 것이다. 


딱히 일을 잘 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제때 퇴근해서 삶을 살고 싶을 뿐인데도 무엇이 되었든 끊임없이 경험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슨 경험을 하든, "오히려 좋아"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다. 모든 종류의 Effort가 Count한다. (노력이라고 썼지만, 말이 주는 맛이 Effort와 Count가 더 좋아서 양해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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