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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옥 Dec 28. 2021

4. 엄마의 보호자로

 수술 이틀 후인 2월 15일, 교수님과의 면담이 잡혀 아빠와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저번처럼 중환자실에서 엄마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외래 진료실에서 교수님을 뵀다.


 엄마 상태에 대해서 듣는 그 행위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혹은 나도 모르게 교수님께서 전해주실 소식이 좋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어서였을까? 죄를 짓고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간 것도 아닌데 진료실에 들어가니 또 심장이 자기 마음대로 빠르게 뛰었다. 아빠와 나는 교수님께 인사를 드린 후 무거운 마음으로 진료실 의자에 앉아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머리를 열고 수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출혈량 때문이 아니라 붓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출혈량은 첫 출혈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뇌가 계속 부어 문제가 된 것이다. 엄마의 뇌부종이 잡히지 않아 한동안은 지켜봐야 하고 만약 뇌가 더 붓게 되면 뇌 일부를 잘라내는 뇌엽 절제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혈압도 불안정한 상황이라 혈압 조절에 좀 더 용이한 24시간 응급 혈액투석으로 복막투석을 대신한다고 하셨다.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진료실에서 나왔다.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뇌 일부를 잘라야 한다던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애초에 뇌의 일부를 자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제발 그 상황만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는 엄마가 의식을 찾으시는 것을 기도하기 이전에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에게 있어 2월의 마지막 주는 한 해 살림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학생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매년 이 시기의 나는 교실 청소에 이사에 정신은 없었지만 새로운 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하지만 올해는 본가에서 우리 집으로 가는 것조차도 싫었다. 혼자 있으면 더 안 좋은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을 것만 같았다.


 월요일에 출근을 해서 텅 빈 교실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메신저에 뜨는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쌓인 먼지 때문인가 싶어 일단 교실 정리부터 하기로 마음을 먹고 몸을 열심히 움직였다. 환기를 시키고 청소를 해도 두통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종일 불편하게 하루를 보내다 퇴근을 했다.


 다음 날, 전체 회의에 가서 들어보니 코로나로 인해 학교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모양이었다. 등교 수업과 원격수업이 복잡하게 얽혀 학기가 시작하는 첫 주에도 등교를 하지 않는 학년이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올해 우리 반 학생들의 명단을 받았다. 종이에 있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보며 호기심에 차야 할 나인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명단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게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올해는 일을 잠시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2월 내내 휴직에 대한 고민을 하루에도 몇 수십 번을 했는데 학생들의 이름을 보니 단번에 마음의 결심이 섰다. 그 학생들에게 미안한 교사가 되기 싫었다. ‘교사가 행복해야 학생이 행복하다.’란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마음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진 시기에 그 학생들을 만나서 안 좋은 영향을 조금이라도 미치게 된다면 너무나 미안할 것 같았다.


 엄마가 언제 일반 병실로 가실지 아니, 가실 수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가 일반 병실로 가실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엄마 손을 제일 처음 잡는 사람이 나였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했다. 간병일 자체는 어떻게든 배우면 될 것 같았다. 그저 엄마가 다시 깨셨을 때 옆에서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지켜 드리고 싶었다.


 다음  아침 조심스럽게 교감 선생님께 휴직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학기가 시작하기 불과 3 전에 휴직 신청을 해서 적잖이 곤란하셨을 텐데도 나의 상황을 십분 이해해 주셨다. 휴직 처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해결되었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렇게 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 엄마에게 전해졌던 것일까? 휴직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8일, 중환자실에서 반가운 전화가 왔다. 내일 엄마가 일반 병실로 가실 수 있다는 연락이었다. 30여 일이 넘어가던 겨울잠에서 엄마가 깨어나셨고, 드디어 나는 엄마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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