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리핀도르 기숙사가 연상되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어릴 때 해리포터 보면서 무슨 기숙사 가고 싶었어?"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때 우린 똑같이 그리핀도르를 지망(?)하던 애들이었다.
그리핀도르는 정의롭고, 용감하고,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진실된 우정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그것이 참되고,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어."
친구도 나도, 이제는 그리핀도르처럼 살기보다 래번클로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같은 뜻을 갖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2016년 철학과 수업을 청강하다가 만나서 친해졌다. 우리는 공강 시간이면 생활도서관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동, 환경, 젠더, 우리와 멀어 보이는 이런 문제들이 실은 얼마나 깊숙하게 일상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불평등, 폭력, 세상의 모든 슬픔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그것을 알고 고민하고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는 거라 믿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슬픔이라는 질병을 앓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우리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경험을 통해 '누군가를 위해 죽겠다'는 결심이 오히려 큰 오만일 수 있음을 깨닫고 돌아와 이렇게 마주 앉았다.
2017년, 나는 한 연합 학회에서 활동하면서 핵문제와 국제정치를 위한 포럼을 기획하고, 평화 버스를 타고 지방을 돌아다녔다.
그때 나에게는 학회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그 시간이 당장의 내 인생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다. 우리에겐 추구해야 할 대의가 있었고, 그 안에서 서로의 안위를 챙기고 서로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은 지극히 사사로운 문제로 여겨졌다.
함께 한 시간은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결국에는 큰 상처만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나는 현실감이 배제된 순수한 결의가 어떻게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 깨달았다. 누군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으면, 먼저 내 인생을 잘 살아야 했다.
곁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친구도 나와 비슷한 일들을 겪으며 비슷한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누군가를 위해 죽겠다'는 생각은 물론 위대한 결심이지만, 그 자신에게는 무책임한 결정일 수도 있다.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숭고한 희생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누군가의 삶이 그토록 소중히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 역시 소중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헌신도 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해본다.
돌아보니 과거 나의 모습은 용기라기보단 치기였다.
그리하여 친구와 나는 '널 위해 죽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우리 둘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삶에 대한 조금 더 정직한 태도이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20대 초중반이었다면 비겁한 궤변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친구도 많이 아파하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제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는 그를 힘껏 응원해주고 싶었다.
그리핀도르를 꿈꾸다 래번클로로 살기로 했다.
슬픈 세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기쁜 인간으로 살겠다.